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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정지혜 ]



형광 초록으로 밝게 빛나는 비상구는 어느 건물에나 있는 것으로, 화재와 같은 사고, 혹은 재난이 일어났을 경우 사람들이 신속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전세계가 약속한 공통된 표시방법, 설치방법들이 존재하고 때문에 사람들은 빠르고 편하게 생명문을 이용할 수 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노래방에 들어갔을 때도 우리는 비상구 안내 방송을 본다. 이렇듯 위험한 일이 발생했을 때는 비상구로 가면 된다.


평상시에 문이 굳게 닫혀있는 비상구는 재난, 위험상황이 발생했을 때에만 개방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하지만 비상구 외에도 건물을 나올 방법은 다양하다. 건물의 설계구조에 따라 에스컬레이터, 계단, 엘리베이터, 구름다리 등 다양한 이동 수단으로 건물 사이를 거닐고 드나들 수 있다.


그렇기에 위험상황에만 개방되어 평소에 이용되지 않는 비상구가 있고, 비상구 외에도 다양한 출입구가 있는 건물이 있고, 숨바꼭질 하듯이 꽁꽁 숨겨진 비상구가 있다. 건물 안에서 누구는 1층 창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고, 또 누구는 정문으로 당당하게 나갈수도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차마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부딪혔을 때, 어떤 한 사건으로 내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마냥 막막할 때, 그때 ‘버틴다’, ‘해결한다’ 이외에도 ‘그만둔다’는 선택지가 존재한다. 삶이라는 것은 다양하고 다채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의 연속이기에 우리에게는 무수히 많은 선택지가 존재한다. 심지어 내가 모르는 선택지까지도 삶 앞에 놓여있다. 내가 못 느끼고 있는 것일 뿐.

 

그 일이 나를 힘들게 하는 요인 중에 하나는 아마 ‘다른 선택지가 없다’라고 느끼는 것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포기하는 내가 너무나 초라하고 한심스럽고, 이것마저도 버티지 못하는 나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사람인가에 대한 고찰까지 들 것이다.

 

하지만 삶은 나의 것이며, 오직 나만이 내 삶을 살아간다. 내면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선택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것을 그만둠으로써 나오는 손해, 하지만 그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다른 선택지로 가고 싶은 본연의 마음.

 

“그러니까 네 내면으로부터 막을 수 없이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시도하면, 그건 이루어진다. 네 의지를 순한 말처럼 부릴 수 있는 거야.”-헤르만 헤세, 데미안

 


“제 스스로 선택하게 할 것. 앞으로 앞으로 나가게만 하지 말고, 멈춰 서서 생각해 보게 할 것. 그것 뿐이야. 그렇게만 하면 아주 잘 돼 나가는 걸.”-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포기하고 도망치는 패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다른 길로 가는 것이다. 버티는 것도, 해결하는 것도, 그만두는 것도, 외면하는 것도 그저 나의 선택일 뿐이다.

 

사소하게 힘든 일까지 전부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인생에서 ‘정말 힘들다’하는 순간이 각자 한 번쯤은 올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이미 왔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다고 느껴서일 수도 있고, 미래를 위해 공부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새로운 사회집단에 적응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고장을 일으키는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에는 ‘해결’의 의미를 지닌 극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는 정석적인 치료 방법 이외에도 자연적으로 놔두는 치료 방안도 있다. 낫기까지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리고 흉터로도 남을 가능성 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곳에 상처가 있었는지, 그 상처가 나를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조차도 잊어버리게 된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일의 원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고 길을 직면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것을 알면,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상처는 더 빠르게 치유될 수 있다.


강도가 들어왔을 때 창문을 깨고 도망치는 사람, 강도에게 순응하고 본인의 재산을 주는 사람, 난리통 속에서 빠져나갈 방안을 찾는 사람이 존재하듯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도덕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한, 그 누구도 당신에게 뭐라 할 권리는 없다. 


꽁꽁 숨겨진 것 같은 비상구는 생각보다 더 가까이 당신 앞에 놓여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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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했지? 쟤네 사귈 거라고!







참고문헌

헤르만 헤세(저자). 안인희(엮은이). (2013). 데미안. 문학동네

무라카미 하루키(저자). 유유정(엮은이). (2000). 상실의 시대. 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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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10-04 14:3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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