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원
[The Psychology Times=방주원 ]
당신에게는 들키기가 죽기보다 싫은 일이 있는가? 작게는 부모님 몰래 벌인 일탈부터 헤어진 전 애인에게 구질구질하게 연락했던 과거까지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죽음을 염두에 둘 정도로 들키기 싫은 것을 생각하거나, 혹은 실제로 들켰을 때, 우리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일상에서 명료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부끄러움, 수줍음, 치욕감 등으로 치환되기도 하는 이 감정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발생한다. 흔히 ‘수치스럽다’라는 표현을 쓸 때 우리는 눈을 질끈 감거나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불편하고 괴로운 상황에 놓인다. 오늘은 이토록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 ‘수치심’으로 평생을 살아간 여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한나’ 라는 여자
그 주인공은 영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의 등장 인물 ‘한나’이다. 1958년 서독의 어느 날, 한나는 비 오는 거리에서 맞닥뜨린 소년과 우연히 사랑에 빠진다. 둘이 만날 때마다 한나는 소년에게 책을 읽어달라 요구했고, 소년은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읽어준다. 그러던 어느 날 열차 운행의 현장직을 맡고 있던 한나에게 사무직으로의 승진 제안이 들어오고,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는 그날로 자취를 감춘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나는 법정에 선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관리하는 친위대 교도관이었던 그녀는 자신의 죄를 모두 인정하고 담담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동료들은 자신들의 죄까지 그녀에게 뒤집어 씌우고, 그녀가 직무를 보고했다고 주장하며 가짜 보고서까지 증거로 제출한다. 법정은 그녀에게 필체 비교를 위해 같은 내용을 작성하라고 지시하지만 한참 망설이던 한나는 그냥 죄를 시인해 버리고 만다.
그녀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답은 그녀의 수치심에 있다. 어린 애인에게 무턱대고 책을 읽어달라 한 것도, 현장직에서 사무직으로의 전환을 뒤로하고 도망친 것도, 심지어는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전범 행위들을 죄로써 인정하는 것도 모두 그녀가 자신이 문맹인 사실을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고백해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보다 감옥에서 평생을 사는 게 더 나은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삶 전체를 뒤흔드는 ‘수치심’은 왜 생기는 걸까?
내 안의 수치심이 고개를 들 때
몇몇 학자들은 수치심을 ‘무가치감’, ‘무능감’, ‘개인적 실패감’, ‘열등감’으로 정의한다. 사람들은 먼저 나 스스로의 가치를 인지하지 못할 때 수치심을 느낀다. 두 번째로는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할 수 없거나 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 때 수치심이 생긴다. 이러한 감정은 개인적 실패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세 번째로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 속에서 발생할 수 있다. 자신의 성취나 존재가 타인보다 못하다 느끼는 감정이 곧 수치심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속성의 수치심은 결국 ‘자신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말 그대로 존재 자체에 근거하기 때문에 자신의 어떤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나쁘다고 느끼고, 또 평가하게 될 때 우리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게 되는 것이다.
나의 수치심과 안전 이별하기
우리는 이런 수치심과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날 수 있지만, 그때마다 헤어질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속에 있는 ‘완벽한 나’에 대한 환상을 깨야 한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완벽에 도달하려 노력하는 존재라는 사실일 뿐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물론 여러 가지 자기 관리나 윤리적 노력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수치심으로 인해 고통받는다면 노력의 방향성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는 집단 속에서 인정과 확인을 얻는 것이다. 집단 상담을 통해 다른 사람의 관점을 경험하다 보면 자신만이 아닌 많은 이들이 같은 수치심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보편적 효과’로써 모든 인간이 자신만의 문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안정감을 얻는 결과를 보여준다. 또한 다른 내담자들에게 ‘보잘것없고 형편없는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그렇게 해도 타인에게 수용되고 인정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경험하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수치심과 안전 이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동반자, 수치심
그러나 위와 같은 방법들을 지속한다고 해서 ‘수치심’이 완전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감정들이 그러하듯 수치심은 언제든지 마음에서 자라나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 한나처럼, 그 감정이 우리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수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동반자가 내 마음의 교실에서 나를 함부로 대할 때, 그를 내쫓을 용기를 가진 것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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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김용태. (2010). 사회-심리적 특성으로서 수치심의 이해와 해결. 횃불트리니티 신학대학원대학교, 서울
2) Daldry, S. (Director). (2008). The Reader [Film]. Studio. Nova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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