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미
[The Psychology Times=황선미 ]
부모가 자주 싸울 때 아이들은 자기가 나쁜 아이라서 부모가 행복하지 않은 것이라 믿어버린다. 실패가 거듭될 때 사람들은 어쩌면 자기가 알게 모르게 저질렀던 과거의 잘못 때문에 하늘이 벌을 내렸을지도 모른다고 믿어버린다. 머리로는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으로 누군가의 탓을 찾는 이유는 그편이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을 계속 보면서 사는 삶보다 덜 아프기 때문이다. 나의 탓이던, 너의 탓이던, 세상의 탓이던, 탓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니까.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탓하기’는 확실한 정보를 좋아하는 인간이 불확실한 세상에서도 어느 정도 통제력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생존 전략이다. 살아남는 방법이기는 하나 나이가 들어서도 ‘탓하기’를 지속한다면 주변에 사람이 줄어들 테니 적정선을 유지하는 게 좋다. ‘불확실한 현실을 피하고자 탓을 했다면 ‘탓하기’를 줄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그 현실이란 게 무엇인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어쩔 수 없는 현실 1)
어쩌면 내가 기대고 싶어하는 어른도 마음은 아이일 수 있겠다.
아기는 자궁에서 나와 어른인 엄마를 만난다. 아기의 환상 안에서 엄마가 자기와 같은 아기였을 가능성은 제로이다. 엄마가 아이였다니, 엄마가 나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였다니, 엄마가 겉으로 보기에는 어른이지만 마음을 들춰보면 나같이 약해 빠진 아이라니, 그러면 진짜 아이인 나는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두려움에 쌓인 아기는 살아남는 전략으로 엄마의 든든한 장점 만을 보기로 선택한다. 인간이 자기와 타인의 속성을 장점-단점, 좋은 사람-나쁜 사람으로 분리하는 순간이다.
‘남의 장점만 보는 사람’ 얼핏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다. 우리의 마음은 음과 양의 밸런스를 맞추고자 하는 성질이 있어서 타인에게서 장점 만을 보는 마음은 자기에게서는 단점 만을 보기 때문이다. ‘내 탓’의 시작이다. 완벽한 엄마와 문제 많은 나, 완벽한 배우자와 문제 많은 나,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은 마음은 상대를 완벽한 사람으로 만들고 상대적으로 자기를 초라하게 낮추어 ‘사실 인생은 혼자다’라는 두려움을 피할 수 있게 해주니, 내 탓을 해도 이점이 남는다. 내가 나쁜 게 낫지, 그래야 상황을 고칠 수 있지, 부모가 어린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나.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부모의 미숙함을 받아들일 즈음에 사람들은 변하기 시작한다. 완벽한 어른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졸업하면서.
어쩔 수 없는 현실 2)
어쩌면 세상에는 원인 없는 결과도 있을 수 있겠다.
근대 합리주의는 인과관계의 공식을 풀어내는 공헌으로 세상을 발전시켰다. 성공에도 합당한 원인이 있고 실패에도 합당한 원인이 있으니 원인만 정확히 파악한다면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논리는 달콤하다. 이런 방식으로 의료계는 암의 원인을 찾고, 정치는 가난의 원인을 찾고, 학교는 문제를 일으킬 아이를 찾는다. 하지만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이 자폐 스펙트럼의 원인인지, 유전의 소인인지 결정적인 시기를 놓친 좌절의 결과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원인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결과를 바꿀 힘이 없다는 두려움을 불러오고, 이 상황에서 ‘탓’은 마음을 달래기 위한 차선책을 취하는 노력이다.
현실 1)이 혼자에 대한 두려움이라면 현실 2)는 무력함에 대한 두려움이다. 저녁 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찾아온 반갑지 않은 ‘공허감’을 느껴야 하는 사람은 오롯이 자신 혼자이다. 그치만 아무리 애를 써도 찾아온 감정 자체를 없앨 수 없다. 그야말로 혼자서 무력한 인생의 조건이다.
우리가 탓을 하는 이유?
그게 그나마 혼자 무력하게 사는 인생에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니까. 하지만 탓하는 습관을 조금 줄이고 싶다면 인생에서 ‘혼자’와 ‘무력함’을 느꼈던 순간들을 찾아보자. 기왕이면 찾은 순간 들었던 마음을 누군가와 나누어 보기를 추천한다. 행동 이면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면 탓하는 습관이 서서히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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