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원
[The Psychology Times=방주원 ]
당신은 지금 한 고급 레스토랑에 앉아있다. 연인과의 행복한 기념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방문한 식당에서, 당신은 잠시 자리를 비운 상대방을 기다리며 에피타이저로 나온 수프를 맛본다. 그런데 이게 뭐람? 수프가 차갑다. 크림은 밍밍하고 들어있는 재료엔 탄력이 없다. 한마디로 ‘차갑고 맛없는’ 수프를 눈앞에 둔 당신이 종업원을 부른다. 그리고 한 경우에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나한테 다 식어 빠진 수프를 줄 수 있죠?” 또 다른 경우에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수프가 다 식었네요. 다시 데워서 갖다주세요.” 두가지 상황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답은 ‘에고’에 있다.
‘에고’의 뜻은 자아, 또 다른 ‘나’이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아니다. ‘에고’는 인간 마음의 정신 이상증세로 불리는 모든 것들의 원천이며, 삶에서의 상당한 고통과 불행이 내 안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이다. 다시 레스토랑으로 돌아가, 첫 번째 경우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어떻게 나한테 다 식어 빠진 수프를 줄 수 있죠?”라는 말에는 ‘불만’이 들어있다. 그리고 불만은 그 누구에게도 득이 될 것이 없는, 불필요한 개인적 감정이다. ‘수프 때문에 개인적인 모욕감을 느끼는 나, 남에게 그 모욕에 대한 책임을 묻고 싶어 하는 나’와 같은 존재가 이러한 불만을 만든다. 이것이 바로 ‘에고’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에고는 특정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감정을 내 마음 안에서 피어오르게 만든다.
‘에고’를 버리고 ‘최선’을 선택하기
한편 당신은 반문할 수 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질 낮은 수프를 먹었는데, 불만을 표출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마음에 에고가 들어올 여지를 남기는 대신, ‘과연 그것이 최선인가?’라는 생각으로 에고를 떨쳐내야 한다. 레스토랑에서 식은 수프를 먹었을 때, 과연 종업원을 나무라는 것이 최선인가? 아닐 것이다. 맨 처음 문단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당신은 종업원에게 수프를 데워서 다시 가져다 달라고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받은 따듯한 수프를 먹으며, 불만에 휩싸인 에고 따위는 잊어버리고 남은 시간을 훨씬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맨 처음, 기분이 태도가 되려는 그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기분이 태도가 될 때, ‘나’를 의심하라.
만족스럽지 않은 서비스에 기분이 나쁠 수 있다. 그것은 나의 ‘기분’일 뿐이다. 그리고 그 기분을 태도로 만드는 것이 바로 ‘에고’다. 우리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제일 먼저 에고가 작동되려 하고 있는지 의심해야 한다. 이 기분이 태도로 이어지는 것이 과연 최선인지, 정당한지, 이로 인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있는지 떠올려야 한다. 의식적으로 이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당신은 나쁜 기분을 무작정 표출하려는 ‘에고’가 아닌, 에고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구분하려는 ‘나’라는 존재가 본래의 당신과 훨씬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에고’는 나지만, 나의 ‘일부’에 불과하고, 그것을 언제든지 떨쳐낼 수 있는 ‘내’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우리는 ‘에고’에 휘둘리지 않는 첫단계를 밟게 되는 것이다.
‘에고’로부터 한 걸음 멀어지기
우리는 사람이고, 감정의 동물이다. 따라서 어떤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부정적 감정을 먹고 자라는 ‘에고’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나의 정체성으로 오인하지 않기만 해도 불만을 행복으로 바꿀 기회가 훨씬 많아진다. 일단 ‘에고’를 인식한 뒤라면 그것에 반응하지 않는 것도, 그렇게 한 걸음씩 멀어지는 것도 점차 쉬워질 것이다. 그리고 이 기사를 읽은 순간부터 당신은 그 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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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에르하르트 톨레. (2013).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서울:연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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