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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안수진 ]



어렸을 때 나는 거절을 잘 못했다. '너는 정말 착한 것 같아.' 종종 부탁을 들어주면 친구들에게 듣던 소리였다. 특히 까다로운 부탁을 들어주면 더 그랬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친구들에게 나는 '착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 말이 듣기 좋았던 것 같다. 나는 낯가림이 심해서 어렸을 때는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말 한마디 먼저 걸지 못할 정도였는데, 이렇게라도 평소에 말을 잘 못했던 친구들과 대화도 하고 조금이라도 친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홉 번 잘해주다가도 한 번 못 해주면 못난 사람이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거절하기 무서웠던 큰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나는 말수도 적고, 공부나 운동을 잘한다거나, 재밌는 사람도 아닌데 '착한 친구'라는 이미지라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 외에도 거절 후에 따라올 수 있는 나를 향한 부정적인 시선, 말투 등도 있었다. 그렇다고 친한 사람들에겐 거절을 잘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혹여라도 그들에게서 소외당하는 계기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 체육 수업이 끝나고 나면 친구들은 내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내 물통의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러 정수기까지 가는 건 너무 번거로운 일이었고, 나는 늘 물을 가득 채워 다녔기 때문이다. 몇 달은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트레스가 됐다. 나는 10분의 짧은 시간을 이용해 부지런히 정수기까지 갔다 오는데, 친구들이 수시로 한 두 모금씩 마시면 원래는 하루에 2번만 갔다 오면 될 일을 4~5번은 갔다 오게 했기 때문이다.


결국 참고 참다가 물을 마셔도 되냐는 친구들의 물음에 '아니'라고 답했다. 친구들은 치사하다며 저마다 한마디씩 하고선 정수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거절한 순간에도, 거절한 후 교실에 혼자 남아 있던 순간에도 내가 별일도 아닌 걸로 심술을 부린 건 아닌지, 이 일로 친구들이 나를 부정적으로 대하는 건 아닌지 불안해 했다. 꽤 오랫동안 나름대로 고민하고 결론 내린 행동이었는데도 말이다.


다행히도 친구들은 이후에도 평소처럼 날 대했다. 그 일 하나로 나를 못된 애라고 생각하거나, 외면하는 일은 없었다. 나만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받았던 게 머쓱해질 정도였다. 사실 되게 사소한 일에 대한 거절이고, 정말 별일 아니었지만, 어렸던 당시 나에겐 큰 도전이었다. 처음이 어렵지, 몇 번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고 그 후부터 필요할 땐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됐다.




나는 왜 거절을 두려워할까?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의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본인이 거절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다. 심리치료 기법 중에 인지이론에 근거한 인지치료라는 치료 기법이 있다. 종류가 다양하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내가 가진 생각이나 어떤 사건을 해석하는 과정에 가지고 있는 왜곡된 인지를 찾아내고 수정하는 치료 기법이다.


필자의 경우 위의 사례처럼 '거절하면 나를 안 좋게 볼 거야'라는 인지적 오류를 직접 경험함으로써 알아냈다. 모두가 이런 긍정적인 경험을 하면 좋겠지만 만약 거절의 결과가 인지적 오류를 강화할 수 있는, 그러니까 '역시 그럴 줄 알았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면 잘못된 생각을 깨닫기는커녕 부정적 감정만 더 커질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한 번쯤 생각해 보자. 나는 '어떤 이유'로 꺼려하며,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에 대답하다 보면 어느 부분에서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깨닫고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수도 있다.




거절당하면 어쩌지?


거절하는 것도 힘들지만 당하는 입장도 힘들 수 있다. 상대방은 미안한 마음과 민망함을 무릅쓰고 용기 내 한 행동이지만 거절 당하는 사람은 자신이 부정당하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럴 땐 이 사실 하나만 기억하자. 그 사람은 내가 제안한 행동이나 의견 등을 거절한 것이지 나라는 '사람'을 부정한 것이 아님을. 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다.




'나'를 위해서라도 거절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거절은 나의 권리이자 의사 표현이다. 그것을 내가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내가 감당해야 한다. 나는 하기 싫거나, 부담스럽거나, 내키지 않는 일을 거절하지 못했을 때, 망설이다 얼버무려서 어쩌다 떠안게 됐을 때 너무 후회스럽고, 내가 멍청하게 느껴지고,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하기 싫은 것을 하게 돼서 받는 스트레스도 있지만, 내가 이 스트레스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는 기회가 충분했음에도 그 기회를 잡지 못한 스스로가 답답했기 때문이다. 더 최악의 경우, 나의 태도 때문에 상대방이 '아, 이 사람에게 이걸 부탁해도 싫어하지 않는구나. 괜찮구나.'라고 받아들이고 비슷한 것을 계속 요구하는 것이다. 결국 내가 확실하고 분명하게 표현하지 못한다면, 계속 고통 받는 것은 '나'다.


거절을 잘 하는 것은 관계와 업무에서도 중요하다. 싫어하는 것을 여러 번 부탁 받다 보면 부탁한 사람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그 사람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를 싫어하진 않아도 부담스러워서 최대한 거리를 두거나,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 있고 나도 모르게 선을 긋는 등의 태도를 겉으로 표출할 수도 있다. 또한, 내키지 않는 일을 하면서 발생하는 집중도, 수행능력 저하 등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 역시 모두 나의 책임이다.



거절이란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솔직해지는 것이다. 솔직하지 못한 관계는 깊어질 수 없으며, 오래 갈 수도 없다. 내가 나에게도 진실하지 못한데, 그런 내 마음을 제대로 헤아려 줄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러니 용기를 가지고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솔직해져 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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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12-26 22:39:24
  • 수정 2024-05-10 00: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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