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금
[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에디뜨를 만난 건 프랑스 아비뇽에서였다.
혼자 여행할 때 끈질기게 따라붙을 외로움을 물리칠 준비를 해야 했다. 두 주 동안 감정어를 쓰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에어비앤비 앱에는 겨울에도 남프랑스의 햇살을 누리며 바비큐를 할 수 있는 근사한 단독주택 사진들이 매력을 뽐냈지만, 아비뇽에서 내가 필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하루를 마치고 들어갔을 때 작은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힘든 하루를 보낸 후 집에 들어가서 저녁으로 뭐 먹을지, 하는 시답지 않은 고민의 말을 주고받다 잠들 때 하루가 완성된다. 하루가 쌓여 일상이 되고, 일상이 쌓여 인생이 되는 것처럼 낯선 도시를 어슬렁거린 후, 사소한 한 마디라도 건넬 수 있는 온기 있는 사람을 만날 때, 여행은 비로소 완성된다.
아비뇽에서 여행 퍼즐을 맞추기 위해 에디뜨의 집을 선택했다. 에디뜨의 집은 세월의 위엄을 망토처럼 두르고 버틴 교황청 바로 뒷골목에 있었다. 교황청 광장에서 벗어나면, 놀랍게도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이어졌다. 차 한 대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골목 양옆으로 돌담이 높게 뻗어 있어 하늘은 조각나고, 모퉁이를 돌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높은 벽에 압도되어 두려웠지만, 이 두려움 때문에 내 GPS를 알아내려고 애썼다. 불확실한 미래를 헤쳐 나아가려면 현실의 좌표를 알 필요가 있는 것처럼.
골목을 지나 에디뜨네 집은 이층에 있다
거실과 내가 사용했던 아늑한 방
에디뜨네 집은 교황청과 사이좋게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끼에게도 적당히 자리를 내어주는 공동주택 단지 2층이었다. 칠이 벗겨진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세월이 곳곳에 묻은 낡은 외투를 입은 집이었지만, 대도시와 달리 공동주택 현관이 활짝 열려있었다. 파리의 새침함에 조금 지쳐있던 터라 오히려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에디뜨의 집을 얼른 보고 싶었다. 앱에서 본 사진과 거의 비슷했다. 방이 세 개 있었고, 그중 딸이 쓰던 방에 내 짐을 풀었다. 작지만 아늑했다. 여행자가 머무는 임시 숙소가 아니라 프랑스인 집에 초대받은 기분이 들었다.
가전제품과 가구를 신상으로 손쉽게 바꾸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는 소비사회 시민의 눈에는 에디뜨의 집은 리모델링이 필요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번쩍거리는 금속성 광택 대신 가구에 묻은 손때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테이블 다리가 언제 주저앉아도 이상하지 않았고, 앉으면 푹 들어가는 말랑한 소파 쿠션은 시간의 무게로 살짝 주저앉았다. 욕실 전등이 깜박거리더니 내가 도착한 다음 날 운명하셨다. 많고 많은 날 중에 굳이 나의 배웅을 기다린 전등의 마음을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안 불편하다면 거짓말이다. 게다가 거실, 욕실, 주방을 모두 함께 써야 한다. 여기는 에디뜨네 집이고, 나는 게스트니까. 그렇다고 지저분하진 않았다. 낡은 물건들이 자리 잡은 집안에는 에디뜨의 안목이 배여 있어서 프랑스적인 삶을 엿볼 수 있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집주인의 취향이 스민 물건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테라스를 향한 문이 있는 벽에는 책장과 테이블이, 파란색 벽을 마주 보고 와인색 소파가 놓여 있었다. 지극히 일상적 물건에서 나는 강한 이국적 냄새를 맡았다. 진짜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아비뇽은 고드르, 루시옹, 생레미, 엑상프로방스 등 남프랑스 여행하기 좋은 거점 도시이다. 작고 아름다운 도시들은 대중교통으로 가기에 불편했지만, 데이 투어를 진행하는 여행사들이 있었다. 거점 도시에서 에디뜨의 집을 선택한 것은, 이 여행 전체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이었다. 에디뜨의 집에는 여행자를 위한 편의시설은 없었지만, 바로 이 불편함 때문에 특별한 곳이었다. 아비뇽에서 뿌리를 내리고 산 에디뜨의 인생 여정에 내 찰나의 여정을 슬쩍 끼워 넣었다. 여행 자체보다 사은품이 더 푸짐한 여행이었다.
에디뜨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튀니지에서 온 하숙생 모하메드와 살았다. 딸은 성인이 되어 파리에, 아들은 고등학생이었지만 리옹에 살고 있었다. 일반 고등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아들은 리옹에 있는 기술 수습생으로 일하면서 안정을 찾았다고 했다. 일정 기간동안 견습을 마치면 대학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했다. 쏠림이 심한 한국에서 진학은 곧 획일적인 입시 경쟁을 의미한다. 다른 방식으로 진학이 가능한 프랑스 입시 제도의 유연성과 에디뜨가 지닌 교육관이 부러웠다. 담담하게 아들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녀의 대범함이 탐났다.
프랑스 가정식 아침은 아주 단출하다. 바게트, 커피 한 잔이나 오렌지 주스 한 잔, 또는 우유 한 잔이다. 별것 없는 아침 식사를 하며 퇴직 후 고정 수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가벼운 아침 식사 자리에서 가볍지 않은 주제였다. 이혼 전에 대출받아서 집을 샀는데 남은 재산은 집뿐이라고 말했던 에디뜨. 모하메드가 지불하는 하숙비와 나 같은 여행자들의 숙박비가 그녀의 주수입원이었다. 지극히 내밀한 대화를 낯선 이방인과 할 수 있는 개방성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평생 다시는 못 만날 낯선 사람과 삶의 무게를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것도 여행의 힘일 것이다.
에디뜨와 튀니지인 하숙생, 남사친
곁을 내주는 사람에게는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이 담겨있다. 여행지에 가면 나는 화려하고 이름난 것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것을 바라보곤 했다. 어느 나라에나 부자가 있다. 파리 생제르멩데프레에 가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두르고, <하퍼스 바자> 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이 실제로 걸어 다닌다. 하지만 나는 화려한 이들의 삶보다는 에디뜨 같은 소시민의 삶에 훨씬 더 매혹된다. 내 삶이 에디뜨의 것과 비슷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와 닮은,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늘 궁금하다.
며칠 동안 본 에디뜨의 일상은 검소하고 순박했다. 매일 저녁 똑같은 시간에, 같은 동네에 사는 남자 사람 친구 폴이 집에 들러서 차 한 잔 마시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고 돌아갔다. 에디뜨, 폴, 모하메드, 나는 대등한 관계였다. 3세 프랑스어로 더듬거리며, 단어를 생각해 내려고 안간힘을 쓰느라 고단했지만, 소통은 상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줄 때 이루어진다. 아기가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무의미한 말을 툭툭 내뱉는다. 하지만 아이를 사랑하는 이들은 무의미에서 의미를 해석하고, 심지어 통역가이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은 소통 불능도 소통으로 바꾼다. 내가 어색한 발음으로 프랑스어로 더듬거리면 에디뜨네 식구들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집중하느라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단어의 답을 맞추려는데 진심이었다. 말하는 사람의 노력과 듣는 사람의 노력이 만나서 대화가 이어졌다. 소통의 기본은 언어의 유창함이 아니라 대화를 이어가려는 서로의 의지이다.
우리가 불금에는 허전해서 치맥이라도 시키듯이, 에디뜨네도 불금에 작은 의식을 치렀다. 식구들이 총출동해서 몇 골목을 지나 극장 옆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혼자 지날 때는 다소 위압적이었던 돌담 골목에 에디뜨 일당과 함께 걸으니 든든해서 어둠마저도 달콤했다. 밤 기운을 받은 골목을 여유 있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낮에는 못 보고 지나쳤던 간판, 거리의 표정을 어둠 속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곧 식당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와인 한 잔씩 주문했다. 집에서 하던 심심한 이야기의 연장전이었다. 나는 여전히 3세 아기처럼 굴었다. 굳이 장소를 바꾸는 이 사소한 의식이, 사람에게는 중요한 추억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소중한 추억의 순간을 채우는 주인공은 ‘나’였다.
두 주 정도 혼자 여행하면 평소에 잘 모르던 외로움이 출현하는데 아비뇽에서는 머무는 내내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마음에 피어오른 훈훈한 봄기운에 보답하고 싶었다. 다음 날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서 파전 재료를 샀다. 파, 호박, 냉동 해산물 칵테일, 밀가루, 계란. 마트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였다. 내 호의를 듬뿍 넣어 반죽하고 파전을 부쳤다. 어제와 똑같은 멤버들과 맥주 한 잔을 곁들여 파전을 두고 식탁에 둘러앉았다. 사람에게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기본적 행위는 친밀감을 선사한다. 에디뜨는 이런 말을 했다.
"늘 여행을 떠날 수 없으니 나는 너를 통해 한국을 여행하고, 너는 나를 통해 프랑스를 여행하는 거지."
에디뜨는 가난했지만, 돈이 목적인 숙박업 주인장이 아니었다. 자신의 방식대로 다른 문화를 여행하는 여행자였다. 아침 식탁은 일반 프랑스 가정식으로 바게트와 커피 한 잔이 전부였지만, 에디뜨와 나는 여행자가 되어 한 시간 가까이 삶을 관통하는 푸짐한 이야기 잔치를 벌였다. 에디뜨네 집을 떠나 다음 목적지인 마르세이유에 가려고 기차를 타야 할 때가 왔고, 에디뜨가 역까지 차로 배웅해 주었다.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비주를 교환하며 "다음에 또 보자."란 구태의연한 인사말을 나누고 헤어졌다. 문득 혼자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는데 누군가 내 몸을 흔들어서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묵직한 마음으로 마르세유 기차에 올랐다.
집에 돌아온 후 에어비앤비 앱에 아직도 남아있는 메시지 함을 가끔 들여다본다.
“너 오고 싶을 때 언제든 다시 와.”
나야 언제나 달려가고 싶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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