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금
[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베트남의 가장 큰 매력은 ‘사람’이었다. 무질서에서 나름의 질서를 보도록 도와주는 것은 사람이었다. 베트남에서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는 여행할 수 없었다. 호텔 로비에서도 스치는 다른 여행자들과도 말을 주고받게 된다. 다른 도시에서 호텔 로비는 내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잠시 스치는 익명의 공간일 뿐인데 말이다. 실제로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불편함은 현지 여행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또한 사람과 만나는 여정이라 혼자 떠나도 여러 사람과 여행하게 된다.
호찌민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자유 여행자들로 넘쳤다. 장기 여행자도 많지만, 온전히 혼자 여행하기에 썩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없다. 일단 바가지요금이 심했다. 모든 지폐에 0이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세어야 해독할 정도로 붙어서 나 같은 숫자 바보는 물건 살 때 이만저만 바쁜 게 아니었다. 환율도 계산해야지, 얼마짜리 지폐인지 0의 개수도 집중해서 읽어야지, 흥정도 해야지, 물건도 받아서 챙겨야지, 혼이 빠지기 일쑤였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을 처리할 때면 뇌가 일시 정지하곤 했다. 버퍼링이 걸리는 순간에 상인이 작정하고 거스름돈을 덜 내주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길을 건널 때면 대혼돈 속으로 뛰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호찌민은 거의 1인 1 오토바이를 가진 도시이다. 사람과 오토바이가 섞여 도시의 풍경을 이루었다. 길 어디에나 오토바이의 물결이 크게 넘실거렸다. 보행자들은 차량과 오토바이 틈으로 요리조리 길을 건너는 기술자들이었다. 신호등이 없는 곳이 많았고, 신호등이 있어도 보행 신호는 힘을 못 썼다. 차가 정지하기를 기다린다면 그 자리에서 망부석이 될지도 몰랐다. 차들과 오토바이의 파도에서 살아남으려면 타이밍을 잘 잡아내는 기술이 필요했다. 이방인에게는 무질서한 혼돈 그 자체였고, 살아남을 궁리를 하느라 내 시선은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툭툭이나 택시, 장거리 버스 등 대중교통을 타는 일은 애를 써야 하는 도전이다. 호찌민은 크고 작은 ‘도전 보따리’를 뒤에 감추고 있다가 여행자에게 불쑥 내미는 도시였지만, 그럼에도 여행자들의 천국이었다. 숙소와 먹거리가 풍부하고 저렴했다. 해가 떨어지고 도시에 밤이 와도 낮의 열기가 그대로 이어졌다. 노천 식당과 카페에는 현지인과 관광객의 활기가 섞였다. 매일이 축제 같은 저녁과 관대한 개방성에 마음을 빼앗겼다.
호찌민에 머무는 동안 현지 여행사인 ‘신카페’를 통해 1박 2일로 메콩강 삼각주에 다녀왔다. 투어에 동행했던 사람들은, 캐나다인 부부, 베트남계 캐나다인 가족, 프랑스인 신혼부부, 미국인 부부 등 주로 영미권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중 프랑스인 50대 신혼부부인 루이와 프랑스와즈와 친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내 심장 mon coeur’이라고 불렀다. 누군가 서로를 ‘my heart’라고 부르는 것을 바로 옆에서 듣는다고 상상해 보시라. 들을 때마다 오글거렸지만, 사랑하는 이들의 호칭에 일반 언어 규범이 적용될 이유가 없다. 자유가 전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사적 영역이므로 나는 오글거림을 참을 의무가 있었다. ‘내 심장’ 부부 곁에서 내 심장은 오글오글했다. ‘심장 부부’를 만난 지 이튿날 알게 된 사실은, 두 사람은 결혼한 지 일 년 차인 신혼부부였다. 신혼부부란 말을 듣고, 내 심장이란 호칭에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 점심을 먹을 때 같은 테이블에 앉기도 했지만, 루이는 동양에 관심이 많았다. 호찌민에서 태어났고, 5개월이 되었을 때 프랑스로 돌아갔다고 한다. 아직 기저귀 차고 누워있을 때라 베트남에 대한 기억이 있을 리 없겠지만, 그의 가슴에는 출생지의 기운으로 가득 찬 방 하나가 있는 것 같았다. 영미권 사람들이 동양인에게 보내는, 대체로 무심한 시선과 대조적이었다. 투어 멤버 중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내게 다정하게 말을 붙였다. 루이에게 나는 한국 그 자체였다. 가이드가 무언가를 설명하면, “한국도 그래?”하고 번번이 내게 물었다. 그럴 때면 짧은 불어 탓에 “꼭 그렇진 않고 조금 달라.”를 반복하곤 했다.
호찌민의 더위는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종류였다. 샤워를 끝낸 후에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다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에어컨이 있는 호텔 방이 아니면 땀에 푹 절여졌다. 손등에 있는 땀구멍의 쓸모가 늘 궁금했는데 호찌민에서 알게 되었다. 호된 더위에 열사병을 배려한 신의 세심함이었다. 손등의 땀구멍에서도 땀이 흘러나와 끈적거렸다.
열기와 습도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훅 불어 머리칼이 목덜미와 볼에 철썩 달라붙었다. 불쾌 지수가 치솟아서 이 찐득한 더위에 무릎을 꿇고 싶어졌다. 그럴 때 달달하고 시원한 음료는 생명수였다. 잠시 들른 카페에서 진한 단맛이 나는 연유가 들어간 베트남식 아이스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내 심장 부부는 아이스 카페라테가 나오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가운 커피를 처음 보았다고 했다. 나는 신이 나서 베트남식 아이스 커피와 한국의 아이스 커피의 차이점을 이야기했다. 심장 부부는 더운 나라에서 커피를 마시는 슬기로운 방법에 감탄했고, 베트남식 아이스 커피에 중독되어 갔다. 무더위에 아이스 커피 하나로 여행자들만의 내적 연대가 쌓였다.
여행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새삼스럽게 바라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평소에 잘 몰랐던 습관이 도드라진 상대에게 툴툴대는 것도 여행의 일부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말로 서로를 부르는 부부였지만, 그 목소리에 달콤함이 제거될 때가 종종 있었다. 메콩강 근처에 있는 재래시장에 들렀다. 살아있는 닭이 닭장에서 거래되기를 기다리는, 진짜 재래시장이었다.
생필품을 파는 잡화점, 시장에 빠질 수 없는 먹거리 골목도 있었다. 물건들에 혼을 빼앗겨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면 곧 길을 잃곤 한다. 들어가면서 되돌아 나올 길을 외워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길을 외우려는 긴장의 끈은 느슨해졌고, 시장 밖으로 나갈 골목을 찾는 게 더 빨랐다. 일행과도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 심장 부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의식의 흐름을 따라 걸음을 옮겼고,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짜증과 초조함이 배인 '내 심장'을 외치는 소리가 시장 골목에 울려 퍼지곤 했다. 서로의 심장을 소리쳐 부르다 마침내 서로의 심장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루이는 저런 식이야.... 블라블라." 프랑스와즈가 투덜거렸다. 나는 미소 지었다. 맞장구를 쳐주기에는 내 불어가 빈곤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두 사람이 알콩달콩해서 귀여웠다.
저녁에 이 사랑스러운 신혼부부와 나는 메콩강변에 있는 한 작은 마을의 호텔에 체크인했다. 공교롭게도 다음 날 심장 부부와 나만 호찌민으로 되돌아가고, 나머지 일행은 캄보디아로 넘어가는 일정이었다. 각자 방에 들어가면서 짐을 푼 후에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지만, 어쩐 일인지 심장 부부는 나타나지 않았다. 서로의 심장을 느낄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의 바른 나는 심장 부부를 부르러 가지 않았다. 후덥지근한 저녁 바람 속으로 혼자 나가서 저녁을 먹었다.
다음 날 아침에 신혼부부를 만났다.
“프랑스와즈가 ‘자기 아이들’과 30분 넘게 통화하느라 함께 저녁 먹으러 못 갔어.”라고 루이가 말했다. 만난 지 고작 하루밖에 안 된 사람들의 은밀한(?) 가족사를, 아무 준비 없이 듣자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태연한 척 루이에게 물었다.
"네 아이는?"
"프랑스와즈는 재혼이고, 나는 초혼이야. 프랑스와즈는 아들 둘이 있고, 나는 아이가 없어."
루이는 3세 불어를 구사하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또박또박, 그리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나는 할 말을 찾느라 머릿속이 분주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모범 가족 신화’를 떠받드는 한국에서 재혼 부부가 사적인 영역까지 공개하는 일은 드물었으니까. 이제 다양한 가족 형태 담론이 조금씩 형성되고 있지만, 가족사를 처음부터 보지 않은 사람에게 굳이 재혼이라고 밝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특히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더더욱 입을 닫기 마련이다.
게다가 루이는 ‘우리 아이’가 아니라 ‘프랑스와즈의 아이’라고 말했다. 만난 지 고작 하루밖에 안 된 나에게 가족의 내밀한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속한 사회 분위기를 암시했다. 가족 형태를 선택할 자유가 있고, 그 선택을 존중하는 분위기라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말에는 그 사회의 문화와 사고가 담겨있으니까. ‘프랑스와즈의 아이’라는 말에서 한국 재혼 가정과 다른 점을 읽었다. 상대에게 감정적으로 지나친 헌신을 기대하는 강박에서 해방된 것처럼 보였다. 가족은 하나가 아니라 다른 개성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작은 집단이라고 공언하는 것만 같았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아는 작은 세상에서 나가는 문이다. 문을 열고 나가서 만나는 세상에 마음이 흔들려 익숙한 세상에서 한 걸음 떨어지곤 한다. 내가 속한 세상이 낯설어질 무렵 여행은 끝나기 마련이고, 내가 알고 있는 세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여행 전과 후의 나는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가치에 균열이 생긴 걸 발견한다. 이 균열은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나침반이고, 방향을 수정하도록 이끄는 속삭임이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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