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금
[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서울은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고, 소중한 삶의 터전이다. 하지만 일상의 강력한 중력 탓에 지루한 곳이다. 게다가 빠른 속도에 맞춰 종종걸음쳐서 쉽게 지치는 곳이다. 서울을 탈출하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리지만, 익숙함이 주는 안온함을 포기할 수 없어서 양가적 감정에 시달린다. 떠나고 싶은 곳이면서 돌아오고 싶은 곳이, 바로 서울이다.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는 법 중 하나는 가끔 여행자가 되어 서울을 보는 것이었다.
서울 여행자가 되다
개인정보보호법이 생기기 전에 한국관광공사에서 ‘명예 통역사’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명예’란 타이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자원봉사였다. 명예 통역사는 한국으로 여행 온 외국인과 동행하며 안내했다. 한국관광공사가 외국인과 현지인을 연결해주었다. 외국 여행객이 현지인을 만나는 기회였고, 나 같은 현지인은 한국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볼 기회였다. 이 신박한 제도가 어처구니없게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폐지되었다. 지금은 SNS에서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날 수 있어서 기관이 굳이 프로그램을 운영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좋은 프로그램이 없어져 아쉽다.
전적으로 개인적 흑심에서 명예 통역사 활동을 시작했지만, 한국을 안내하는 일은 일상의 중력을 벗어나는 흥분이었다. 서울은 낯선 것들을 품고 발견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이 고플 때, 즐길 수 있는 상황일 때, 서울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을 맞이했다. 핀란드에서 온 친구 두 명, 홍콩 커플, 에콰도르에서 IT 회사 소속으로 출장 왔던 여성, 이탈리아에서 온 은퇴한 부부, 그리고 타히티 지질 연구소에 근무했던 프랑스인 안느마리 등등. 나는 굵고 짧은 것보다 ‘가늘고 길게’가 맞는 체질이라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소극적으로 서울 여행자가 되었다.
오랫동안 서울 붙박이로서 서울을 잘 알지만, 또 전혀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서울의 극히 일부만 알기 때문이다. 내 행동반경, 다시 말하면 출퇴근 길과 사적 만남을 위해 찾아가는 지역은 지극히 한정적이다. 집에서 반경 10km 내외가 아마 내가 잘 아는 서울일 것이다. 서울 원주민이지만 막상 안내하려니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일단 서울 지도를 펼치고, 그들이 묵는 숙소 위치를 확인했다. 동선을 파악해서 걷기 좋은 곳, 이동 수단, 볼거리와 먹거리를 고민하고 계획했다. 이는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날 때 하는 준비였다. 한국 문화를 처음 접하는 외국인의 관점과 내 관점 사이에 폭이 넓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내 역할은 이 개울에 징검다리를 놓는 것이었다. 징검다리를 하나둘 놓으면서 서울은 지루한 곳이라는 누명을 벗었다. 일상도 여행이 되는 순간이었다. 여행자들 덕분에 서울 여행자로 변신하는 즐거움을 조금씩 음미했다.
@낙선재, 서울
한국적인 것이란?
하지만 한국을 처음 방문한 외국인에게 서울을 안내하는 일은 만만하진 않았다. 유럽인이 퓨전식 유럽풍 카페를 인상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나도 잘 모르는 한국의 전통미를 섭외하고, 소개해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차 한 잔을 마셔도 한국인에게 ‘힙한’ 카페가 아니라 한국 고유한 정서를 느낄만한 한옥 카페를 검색했다. 새소리나 판소리가 흘러나오는 카페에서 전통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에 가는 것은, 내게도 여행이었다. 국적 불문의 퓨전 카페가 서울을 접수해서 전통 카페를 찾는데 수고가 필요했다. 현지인인 나만 알고 있는 한국적인 곳을 수배해야 했다. ‘한국적인 것’이 과연 무엇일까? 나도 모르는 한국적인 것을 소개하는 일이 가능할까? 나야말로 외국인 여행자나 마찬가지였다. 파리의 골목을 샅샅이 알고 싶어 지도를 끼고 살았던 적이 있지만, 서울 골목에는 그 호기심을 절반도 나누어준 적이 없었다. 이들 덕분에 조금씩 한국의 과거를 들추고 골목을 찾아보았다. 음식 역시 평소에 잘 안 먹는 수정과나 식혜 등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요리법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나는 요리 문외한이고 요리 똥손이다. 게다가 수정과, 식혜, 막걸리보다 커피와 맥주에 대해 할 말이 더 많았다. 나는 가까이 있는 것을 외면하고, 멀리 있는 것을 꿈꾸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시공간을 초월한 '인생 여행자' 안느마리
2007년에 처음 만난 안느마리는 시공간을 초월한 진정한 ‘인생 여행자’였다. 당시에 안느마리는 환갑이었지만, 삼십 대였던 나보다 더 젊게 살았다. 그녀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돈키호테였다. 한국에 오기 전에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화산섬인 제주도 여행을 할 계획이라며 숙소 예약에 대한 도움을 요청했다. 말도 안 통하는데 혼자 운전해서 제주도를 여행할 계획을 세우는 대담함이라니!
@남대문을 올려다 보는 안느마리
드디어 안느마리가 머무는 안국동 게스트하우스로 찾아가서 만났다. 첫인상은 공손하고 차분했다. 리무진을 타고 잘못 내려서 많은 짐을 끌고 헤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행자라면 공감 백 개는 줄 수 있는 숙소 찾는 이야기였다. 서울에서 그녀의 여행 계획은 ‘나’였다. 묵직한 임무를 맡았지만, 나도 서울의 정취를 알아가는 터라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없었다. 삼청동 골목과 작은 갤러리를 구경하고, 북촌 칼국수에서 칼국수와 왕만두를 먹었다. 인사동 거리에서 꿀타래 만드는 것을 보고 한옥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별로 창의적이지 않은 일정이었지만, 안느마리는 모두 한국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못 먹는 한국 음식이 없었다. 서양인이 먹기 힘들어하는 물냉면과 회까지도 척척 접수했다. 외할머니가 폴란드인인데 한국 음식에서 할머니가 만들어준 음식 맛이 난다고 했다. 유라시아 대륙이 하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싶었다. 안느마리는 한국에 처음 왔는데도 아련한 향수가 있었고, 그 향수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한국의 절을 보여주고 싶어서 하루는 강화도 전등사에 갔다. 내가 한국 역사를 잘 몰라 좋은 안내자가 될 수 없어서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지만, 안느마리는 좋은 여행 친구였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고, 가는 곳마다 보는 것마다, 호기심을 가득 담아 바라보고, 카메라에 담았다. 안내하는 사람의 흥은 안내받는 사람의 반응을 연료로 삼아 불타오른다. 안느마리는 내 흥을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게 한 적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같은 간단한 한국말을 외워서 식당에 들어가면 서툰 발음으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어색한 발음 속에서도 먼저 다가가려는 공손한 진심이 전달되었고, 가는 곳마다 그녀는 환대를 받았다.
예의 바르고 조용한 이 프랑스인은 보기와 달리 엄청난 도전 에너지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낯선 것 앞에서 거침없이 시도하고, 배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은퇴 후 삶을 고민하는 나이에 접어든 터라 한국에서 살고 싶어 했다. 한 달 집세를 내게 묻고, 생활비를 뽑아서 이야기해 줄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계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옮겼다. 한국의 여러 대학 연구소에 자신의 이력서를 보냈다. 비록 돌아온 건 거절 답장뿐이었지만 말이다. 프랑스 남부지방 툴롱에서 태어나 타히티에 살며 한국에 이력서를 보내는 삶, 그것도 환갑이란 나이에. 무척 낯설었다.
삼 년 후에 안느마리를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홍콩 어느 회사에 지원서를 넣고, 면접 보러 가는 길에 서울에 들렀다. 환갑이 넘었지만, 나이를 잊고 세계를 무대로 구직 활동을 하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청년도 거절만 당하는 구직 활동에 비관하고 좌절하기 마련이다. 도전이란 말은 결과를 알 수 없을 때 종종 쓴다.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가 따라붙을 수도 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일단 해보는 패기는 주로 젊은이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도전은 동전 던지기와 같아서 땀을 쏟아도 꼭 원하는 면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세월을 통해 배웠다. 안느마리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만,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고 포기하며 비관하는 노년이 아니었다. 안느마리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참인 명제였다. 도전하고 실패하고, 서툴러도 시도하는 한 그녀는 영원한 젊은이로 살아갈 테니. 그녀의 젊음을, 패기를 조금 훔치고 싶었다.
이런 진취성은 대체 어떻게 생기는지 수수께끼였다. 나는 쫄보라 떠나도 돌아올 곳부터 생각하는 데 안느마리에게는 돌아갈 곳은 아무래도 좋았다. 일할 수 있는 곳이 집이고, 마음 붙일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처럼 말했다. 정해진 틀이 없이 사는 멋진 언니라니, 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처럼 진취적이고 도전적으로 살 수는 없겠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내 레벨도 올라간 기분이 들어 우쭐했다.
안느마리가 두번 째 한국에 왔을 때는 경주로 1박 2일 동안 함께 여행을 떠났다. 숙박하며 같이 여행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꼬박 이틀 동안 영어를 써야 하고, 모든 동선을 챙기고, 식당을 선택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내가 준비한 여정이 마음에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느마리는 불평 한마디 없는 여행 친구였다. 안느마리는 홍콩면접에서 떨어지면, 프랑스로 돌아가서 여행사를 세워 한국으로 패키지 여행객을 데려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실제로 여행사를 차렸고, 모객 중이라고 연락이 왔다. 그녀를 돕고 싶었다. 수소문해서 서울에 있는 여행사의 연락처를 알려주었지만 아쉽게도 모객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에도 드문드문 이메일로 근황을 주고받았다. 어느 날, 프랑스 남부의 베르동 협곡에서 가이드로 일한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가이드로 일하면서 만난 한국인과 한국 식당 발견에 대한 즐거움과 소소한 근황 소식을 보내주었다.
무색무취의 관습과 관성을 바라보기
한국에서는 인생 여정 답안지가 있다. 졸업 후 안정된 직장과 화목한(?) 가정을 향해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다. 대체로 비슷한 삶을 추구한다. 나도 그 대열에서 이탈할 깜냥이 아니다. 답안지에 가까이 가면, 반듯한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이라는 라벨을 붙여준다. 가끔 여행을 다녀와서 자신의 궤도로 다시 들어가는 삶에 ‘멋짐 라벨’를 덧붙여준다. 안느마리의 인생 여정은 한국식 멋짐 라벨에 전혀 맞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불안정하고, 일관성 없고, 자주 실패하는 삶이다. 하지만 그녀의 삶 자체는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고유한 여행이다. 그녀는 몸과 마음을 던져 삶을 여행하는 여행자이다. 노화의 포로가 되어 기운 없이 투옥되길 거부하고, 언제나 모험을 찾아 떠나는 방랑자이다.
서울에서 관습은 공기처럼 무색무취로 밀착되어 알아차리기조차 힘든데 안느마리는 내가 안락하게 안겨있는 무색무취의 존재를 일깨워주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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