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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낭만적 허구를 실현하려는 꿍꿍이로 프라하 여행은 시작되었다. 프라하에서 누군가는 ‘연인’을 만나기를 꿈꾼다면 나는 ‘프란츠 카프카’를 만날 꿈을 꾸었다. 자신이 속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평생 경계인으로 살았던 카프카. 본능적으로 카프카의 삶에 감정이입이 되어 끌렸다. 그는 법학을 전공하고 노동보험공단에서 일하면서 밤에 소설을 썼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본캐’와 ‘부캐’를 운영했다. 그는 본캐와 부캐 사이에 놓인 깊은 강 사이에 자신만의 다리를 놓았다.


카프카는 지독하게 권위적인 아버지의 자장 아래에서 자랐다. 체코에서 태어났지만, 독일어로교육을 받았고, 독일어로 글을 썼다.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운명 속에서 살았던 작가였다. 그 기분을 《변신》에서 한 마리 벌레로 묘사했다.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가 평생 느꼈을 이 소외감을 음미하고 싶었다. 또 알베르 카뮈가 여행자가 되어 프라하 골목을 헤매다 3일째 되는 날, 말 한마디 안 통하는 곳에서 문득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했고, 그 순간 눈물샘이 터질 것 같은 심정을 내 가슴으로 느끼고 싶었다.


저녁 8시쯤 프라하 중앙역에 도착했다. 거리는 짙은 어둠의 베일을 써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숙소까지 가는데 캐리어 바퀴가 포석에 닿아 요란하게 울렸다. 프라하 거리에 씌워진 우아한 베일을 내가 훼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오전 10시쯤 숙소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화약탑 광장으로 갔다. 구시가가 팝업 그림책처럼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11월의 꽤 쌀쌀한 날씨인데도 광장에는 사람들로 넘쳤다.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내가 음미하려고 별렀던 우수는 한 방울도 맛볼 수 없었다. 대신 진짜 사람들이 만든 생생한 활기가 광장을 채웠다. 아침 장사를 준비하는 상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였고, 와인을 끓이는 향이 식욕을 자극했다. 핫와인 한 잔을 들고 춤을 추듯 빙글빙글 광장을 한 바퀴 돈 후에 화약탑으로 올라갔다. 높은 곳에서 보니 사람들이 모여있는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작은 점이 모여 선을 만들고 면을 만드는 것처럼. 가까이서 보면 떨어져 있는데 멀리서 보면 한 덩어리처럼 보인다. 서울에서 나는 고유한 개인이지만, 프라하에서는 그저 한국인인 것처럼. 어디에 있는 내가 진짜일까.


‘카프카스러운’이란 말이 있다. 희망 없고, 참을 수 없는 모든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저울에 해야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을 올려두고 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에둘러 말하는 게 아닐까. 카프카스러운이란 말을 벗어나기 위해 그는 ‘쓰기’를 택했다. 억압적 환경에 적응하는 척하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했다. 해야 할 일이 좋아하는 일과 일치하지 않을 때, ‘타협’이라는 카드를 꺼낼 수 있다. 어른의 삶이란 자기 몫의 하기 싫은 일을 해내는 것이니까. 카프카는 자기 몫만큼 어른으로 살았고, 자기 몫만큼 로망을 좇았다. 내가 동경하는 삶이었다.


카프카가 평생 품었던 내적 갈등은 내 것처럼 낯설지 않았다. 불안을 유발하는 그의 갈등에서 위안을 얻는다. 흡족하지 않은 본캐를 가지고 삶을 지탱하기 위해 사람마다 발광 수단을 찾아 나선다. 나는 현실과 로망 사이에 난 틈을 메우기 위해서 떠났다 돌아오곤 한다. 쓸모없어 보이는 ‘죽은 자와의 교감’을 찾아 떠난다. 과거에 살았던 이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카프카스러운 상황에 놓인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래, 나 혼자 힘든 게 아니라구’ 안도한다. 누군가는 매주 맛집 프로그램을 보고 직접 식당에 가는 수고를 한다. 미식의 세계 탐험은 누군가에게 구원이다. 어떤 이는 산으로 달려가서 신체의 한계에 도전하며 강렬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고, 대자연 앞에서 겸손을 배우고 돌아온다. 나는 책에서 읽은 문장들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힘을 얻는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게 있었다. 로망의 생명력이 지속되려면 허구로 남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로망이 실현되면 낭만이란 겉옷이 벗겨진다. 카프카의 소설 《소송》이나 《성》에서 배경이 된 프라하 대기는 안개가 자욱해서 형체를 잘 분간할 수 없다. 권위는 안개처럼 주인공을 따라다니며 시야도 가리고, 판단력도 뒤흔든다. 아마도 소설에 받은 막연하고 답답한 분위기 때문인지 프라하를 어렴풋한 분위기에 싸인 도시로 상상했다. 소설에서 느낀 ‘우수’란 인상을 찾았다. 우수는 사전적 정의로는 ‘시름이 있는 상태’이다. 이 상태는 프라하에 가더라도 찾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우수를 마치 유형의 기념물이라고 믿었고, 우수를 직접 본다는 설렘으로 부풀었다. 우수는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란 것을 몰랐다.


블타바강을 사이에 두고 구시가와 성채 단지가 나뉜다. 소설 《성》에서 묘사된 것처럼 강 아래서 보면 성은 높은 곳에 자리 잡아 아득해 보인다. ‘성’의 실체에 다가가려는 주인공 K는 성 아래에서 소통이 안 되는 사람들을 만난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말을 해대고 성에 가기 전에 K는 점점 지치고 불안에 휩싸인다. 어느 조직에서나 마주하는 상황처럼.


K의 정신이 늪지로 둘러싸인 미로를 헤맸던 것과 달리 트램은 나를 단번에 성채 단지로 데려다주었다. 성채 단지는 강 아랫마을과 별개로 살아 숨 쉬는 작은 마을이었다. 성도 있고, 성당도 있고, 성 밖에 작은 집이 모여있었다. 원래 성을 지키는 병사들의 막사로 사용되다 연금술사들과 금은세공사들의 작업장이 되면서 황금소로란 이름이 붙었다. 이 골목에 있는 작은 집에서 카프카는 글을 썼다. 집에서는 소음이 가득해서 글을 쓸 수 없었던 탓이다. 지금은 기념품 가게들로 변한 황금소로는 카프카가 보면 달아날 풍경으로 채워졌다. 관광객들의 번잡함이 좁은 골목을 메웠다. 물론 나도 내 몫의 번잡함을 지참하고 열렬히 번잡함에 기여했다. 카프카의 흔적이라고는 카프카 기념품 가게에서나 만났다.


성채 단지를 벗어나서 내려와서 카프카 뮤지엄으로 향했다. 벽이 베이비 핑크색으로 칠해진 건물이었다. 뮤지엄 안은 어두웠다. 《소송》의 여러 판본과 카프카의 일기가 발췌되어 전시되어 있었다. 또 카프카가 살았던 당시의 프라하 전경이 단편 필름으로 상영되고 있었다. 프라하의 사계를 배경으로 성채 마을에 살았던 카프카가 블타바강을 건너 통학했던 길도 담겨있다. 카프카가 살았던 프라하의 속살을 한참 보았다.


카프카 뮤지엄을 나와 코젤 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생각을 정리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인을 알아야 한다. 원인을 알 수 없으면 해결책도 없다.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들이 겪는 불안은 내 불안과 닮아있었다. 외부의 절대적 질서를 부정하면서도 따르며 내적으로는 점점 소외된다. 외적 질서와 내적 질서의 불일치를 극복하는 수단이 내게도 필요했다. 카프카는 소설을 쓰면서 보이지 않는 권력, 힘이 만들어낸 불안과 끊임없이 싸웠다. 나는 무엇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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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3-20 23: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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