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지
[The Psychology Times=김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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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게 도취된 모습을 타인에게 숨기지 않는, 언뜻 보기에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나쁜 x’들.
이들을 제외하고 나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남는다.
나쁜 x의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빠르게 알아차린 뒤에 그들과 거리를 두는 사람들. 그리고 마치 자석처럼 나쁜 x에게 더욱 강렬하게 끌리는,'당신 같은' 사람들.
당신이 사랑했었던, 혹은 사랑하고 있는 연인이 ‘나쁜 x’ 즉,‘나르시시스트’ 라고 한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유독 강한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극적이거나 복잡한 것들에 큰 관심을 나타내곤 한다. 도전적인 목표를 앞두게 되었을 때도, 도망치기보다는 오히려 성과를 달성해 내어 성취감을 느끼고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그렇기에 이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상대방은 곧, 완벽한 도전 과제나 마찬가지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마치 도발을 하듯 상대를 자극한다. 그리고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의 연인은 점점 더 스스로가 부족하고, 못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기에, 연인에게 집착하게 된다.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강한 사람이었던 만큼, 결국에는 연인의 모든 욕구들을 자처해서 파악하고 해결해 주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맞춰주는 이들로서는 상대방에게 스스로가 대체 불가능한 존재일 거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에게 연인이란, 단지 본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연인이 그들의 종잡을 수 없는 태도에 몹시 혼란을 느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분명 본인은 연인에게 꽤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여겨왔는데 미련 없이, 단칼에 자신을 버릴 것만 같은 연인을 대하노라면,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노력에 대한 가치가 모두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들은 상대의 결핍을 챙겨주며 자신을 증명하는 순간에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본인의 사랑과 가치를 높게 평가하며, 그런 행동을 하는 스스로에게 취하여 더욱더 노력한다.
삶에 대한 욕구, 존재에 대한 가치를 채워주는 누군가가 없으면 스스로도 사라지기에, 결국 이들에게 자신의 연인인 나르시시스트는 절대적인 존재나 다름이 없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충동은,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나르시시스트들에게 목표물이 되기 쉽다. 여기서 말하는 ‘필요’란 일반적인 연인들 사이의 사랑 같은 감정과는 판이하다. 나르시시즘을 가진 사람은 상대의 경제력이나 노동력, 혹은 자기 자신의 성, 자존감을 채우기 위한 비교 대상 등으로서 연인을 만들고, 만남을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주변을 살펴보면 간혹, ‘왜 그 사람처럼 잘난 사람이 나를 곁에 두는지 모르겠다’ 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만약 그 커플의 연애에 대해 듣게 된다면, 당신 또한 곧 그들의 연애가 얼마나 불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비정상적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안정형 커플들이 상호 존중하는 모습과 다르게, 나르시시스트의 연인은 그들에게 있어 비교 우위 대상이 되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합리적이고 불균등한 관계 속에서 그들은 연인을 비난하고 밟고 올라선 뒤에, 자신이 잠시나마 높은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그들의 연인을 일종의 도구로서 취급한다.
강해 보이다가도, 때로는 나약해 보이는 나르시시스트를 돌봄으로써 ‘강한 사람을 돌보는 나’로서 자아를 채우는 그들의 연인이 있다. 이렇게 강한 사람도 자신의 앞에선 나약하고 결핍을 가진 사람으로서 느껴지니, 자신의 역할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순간적으로 강하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스스로가 이타적이며 상냥하고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누군가의 ‘구원자’가 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감정은, 도와주어선 안 되는 사람을 돕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의 기저에는 사실, ‘상대는 자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즉 자신은 사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상대를 멸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타심은 이기심으로부터 비롯된다. 기부하는 행위 역시, 결국 그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는 인식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스스로가 그보다 ‘덜’ 불쌍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결코 일방적일 수 없다. 서로 주고받는 '호혜성'이 없는 사랑은 결국 이별을 맞이하게 되며, 그 이별은 본인의 가치가 부정 당한다는 느낌에 의한 분노로, 상대를 다시 잡으려는 형태로 다시금 나타난다.
본래의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결과적으로, 이러한 연애의 패턴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존재인가를 묻고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르시시스트, '나쁜 x'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오카다 다카시. (2017). 애착 수업. 푸른숲
이계정. (2015). 심리학자와 함께 가는 치유의 영화관. 소울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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