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령
[한국심리학신문=김혜령 ]
# 관대한 엄마가 되는 것보다 어려운 것
어렸을 땐 너그럽고 관대한 엄마가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부모님들처럼 저희 부모님도 엄격하신 편이었고, 덕분에 그게 의도와는 다르게 아이를 작아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이제 어른이 되어 결혼하고 딸아이를 키웁니다. 저는 관대한 엄마가 되었을까요? 사실, 아직 아이가 어려서 잘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것만은 확실히 알아요. 아이에게 관대해지는 것보다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는 게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요. 저는 때때로 저 자신에게 가장 날카롭고 가혹한 기준을 들이댑니다. 아마도 어린시절 저의 부모님보다 지금 제 안의 '엄격한 자아'가 훨씬 더 무서울 거에요.
엄격한 자아는 저에게 자주 언성을 높입니다. '왜 이렇게 게을러! 왜 이렇게 꼼꼼하지 못해!' 육아를 하며 잔소리는 늘어났어요. 힘에 부칠 때면 '다른 엄마들 다 하는 건데 넌 뭐가 힘들다고 엄살이야!.' 아이가 편식을 해도 제 안에서는 '너가 음식솜씨가 형편없으니 그렇지! 남들은 3첩반상이다 5첩반상이다 하는데 더 정성을 들여보라구!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아이가 다치거나 감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니가 더 세심하게 챙겼어야지!' 라고 혼냅니다. 아이가 떼를 많이 쓰는 날에는 '너가 훈육을 제대로 안해서 그렇잖아!' , 심지어 자고있는 아이를 보고 있을 때에도 '이렇게 천사같은 아이에게 왜 더 잘해주지 못하니'라고 따가운 말이 들려와요. 하루종일 고생했을 저 자신에게 따뜻한 말한마디 내어주는게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엄마가 되고난 후부터는 어쩜 이렇게 다 내 잘못인 것만 같은지 신기할 정도에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혹은 작은 실수 앞에서도 나를 책망합니다. 자책감은 매우 익숙한 감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주변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었어요. 꽤 오래 전, 친한 지인 H가 임신했을 때 식사자리에서 했던 말을 아프게 기억하는데요. 만삭의 배를 쓰다듬으며 아주 슬픈 표정으로 '난 가난한 엄마야' 라고 했었어요. 아이에게 많은 걸 해줄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H와 그녀의 배우자는 평범하게 경제활동을 하며 살고 있었고, 큰 욕심 없이 소박하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 많이 부족하게 느껴졌나 봅니다. 다른 동생의 말도 인상깊게 남아있습니다. 10년 가까이 재직해온 직장을 그만둘지 고민하며 저에게 '나는 아직도 나밖에 모르는 것 같아 언니, 아이를 낳지 말았어야 했나봐.' 라고 했어요. 정작 가장 힘든 건 자신들일텐데 스스로에게 낮은 점수를 주는 그 시선이 참 속상했어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엄마로서의 부족한 점을 술술 늘어놓습니다. 대부분이 내가 얼마나 부족한 엄마인지 말하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어요. 보통의 삶을 살고 있던 사람들도 엄마라는 이름표를 달고나면 더 엄격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게 되는듯 합니다. 장점이나 재능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평범함이 가난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자신의 '부족'에 포커스를 맞추며 피할 수 없는 우울이나 자책감이 자신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는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이죠.
# 자신을 비난하는 건 겸손이 아니다
시작은 '내 아이에게는 좋은 것만 주고 싶고 좋은 환경을 갖춰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또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 항상 뭔가 부족한 게 없나, 내가 실수한 건 없나 살피는 게 나쁜건 아닐거고요. 겸손하고 늘 자신을 되돌아보는 사람이라면 성숙하고 멋진 엄마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습관적인 '자기비난'으로 이어진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과도한 자기비난은 겸손과는 다른 얘기죠. 너그럽게 대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 자신을 항상 못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니까요. 게다가 엄격하게만 자신을 대한다고 해서 부족함이 개선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을 지속적으로 비난하고 책망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발전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문제에서 도피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어떻게 더 나아질지 고민하는게 아니라 '내가 부족해서 그래' 라며 그저 자신을 부정적으로 정의하는데에서 그치기 때문이지요. 뿐만아니라 자기비난은 마음을 병들게하기 좋은 습관이기도 해요. 많은 마음의 병이 생각을 과도하게 많이하는 것에서 비롯되는데요, 우울증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생각의 상당부분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중 많은 부분이 자기비난이나 후회와 같은 것이고요. 그런 생각은 어쩔 수 없이 '죄책감, 열등감, 무가치함'같은 불편한 느낌으로 이어지지요. 이 느낌이 강하게 지속되면 마음의 병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경향은 특히나 우울에 취약한 성격적인 특성이고요*.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작은 실수나 뜻대로 되지 않는 크고작은 일들 앞에서 자신을 다그치고 비난하는데에 익숙해져 있어요.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많은 일들 앞에서 내탓이라고 내 부족 때문이라고 고집스럽게 나를 평가하고 혼을 냅니다. 부모가 되면 이 습관이 더 강해진듯 해요. 그렇지만 문제를 개선시키지도 않고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만 하는 거라면 나를 이렇게 엄격하게 다룰 필요가 있을까요.
# 미움만 받는 사람이 아이에게 큰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지속적인 비난은 사람을 소진시킵니다. 혼나기만 하는 아이는 위축되기 십상이고, 상사에게 욕만 먹는 직장인은 쉽게 지쳐버릴 겁니다. 악플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가듯 격려와 지지 없는 무자비한 채찍질은 의도가 무엇이었건 생의 에너지를 고갈시켜요. 제가 관대한 엄마가 되고 싶었던 건 단순히 좋은 엄마가 되고싶었던 게 아니라 아이가 잘 클 수 있도록 비옥한 환경이 되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나를 평가하고 책망하면서 내가 나를 시들게 하고 있었던 거에요.
이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는 부족한 점에만 포커싱하지 않으니까요. 애정을 가진 사람을 대할 때는 그 사람이 설령 실수투성이라고 하더라도 격려하고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그리고 그 격려가 그 사람을 성장시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우리가 처음 아이를 만났을 때를 기억해보세요. 어떤 기준도 잣대도 없이 맑은 사랑의 눈으로 바라봤을 거에요. 어떤 흠도 찾을 수 없고, 모든 게 이뻐보였죠. 누구보다 건강하기를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랐을 거고요. 생애초기에 엄마들이 주는 크나큰 애정은 아이가 발달하는 엄청난 동력이잖아요. 아이에게 계속해서 큰 사랑을 주기 위해서는 그런 마음을 자기 자신에게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넘치는 사랑을 줄 수 있을까요? 미움만 받는 사람이 누군가를 큰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자기 자신을 보는 시선은 결국 커가면서 아이를 보는 시선이 될 겁니다. 인형처럼 누워있을 때에야 사랑을 주기만 하는 게 어렵지 않았지만, 커갈수록 내 엄격한 기준은 아이를 보는 기준이 되겠지요. 내 부족한 모습이 오버랩되는 아이를 보면 화가나고, 결점은 커보이고, 그럴수록 아이와의 관계도 순탄하지 않아 더더욱 어려운 과제가 될 겁니다.
나를 지지하고 격려하기 위해선 내 안에 있는 엄격한 잣대부터 수정할 수 있어야겠지요. 엄격한 잣대에 큰 몫을 하는 외부요인 중 하나는 '엄마'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 입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있지요. 참 멋진 말입니다. 실제로 많은 여자들이 엄마가 된 후 단단해지고 성숙해지는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이 말이 '충분히 강해지지 않으면 엄마로서 자격이 없다.'는 뜻은 아닐겁니다. 아이를 키운다고해서 신사임당이나 한석봉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시대가 변화해가면서 엄마의 역할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평일에는 직장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내는 워킹맘도 많고, 아빠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살림을 전적으로 맡아서 하는경우도 많지요. 자신에게 맞게 또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해내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사회에서 요구하는 엄마의 이미지를 검토해보고 그 것에 걸려있지 않도록 주의해야해요. 이상화된 엄마상을 기준으로 둔다면 그렇지 못한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을 채찍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약하고 엄마도 약합니다. 인간은 모두 약해요. 이걸 인정하지 않으면 서투르게 강한척 하다가 오히려 쉽게 무너집니다. 진정한 강함은 약함을 인정하는데서 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돌이켜보면 전지전능해보이던 부모가 결점을 지니고 여린 마음을 지닌 평범한 인간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서 우리도 성숙해지지 않았던가요. 부모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롭게 살아보려고 애쓸 때 아이들도 건강한 방향으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실은 나를 사랑하는 일이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평생의 과제가 될 정도지요. 그런데 그걸 해낸다면 아이와의 관계도, 아이를 사랑하는 일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이건 확실해요.
만약, 지금 엄격한 자아만이 당신을 돌보는 유일한 존재라면 육아(育我)는 고문에 가까울 겁니다. '나'라는 아이가 계속해서 비난받고 미움받고 있는데, 또 다른 아이를 키워내야 하는 거니까요. 늘 혼나기만 해서 쪼그라들어 있는 아이가 다른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운다고 생각해보세요. 상상만 해도 너무 힘겨울 것 같지 않나요. 내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고 싶다면 내 안을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내 아이를 키울 연료는 내가 나에게 주는 격려와 지지로부터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엄격한 시선을 거두고 애정으로 나를 돌볼 수 있다면 육아난이도도 그렇게 높지만은 않을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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