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지
[한국심리학신문=김민지 ]
PIXABAY
10대들의 약육강식 : 힘과 돈으로 우열을 가리는 소년들, 범죄의 미끼로서 이용되는 소녀들
소년범들 사이에는 어찌할 수 없는 ‘계급’이 존재한다.
보편적으로 이들 중 대부분의 소년들은 강자이고, 소녀들은 약자에 해당한다.
이러한 상황에 놓인 소녀들에게 소년이란, 무섭지만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다.
‘여자’, 그리고 ‘청소년’으로서 살아가기에, 이들은 누군가의 ‘보호’가 간절하기 때문이다.
이들 스스로도 이용당하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런 부분이 싫다고 생각했으나, 혼자서는 도저히 뭔가를 해 낼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그 기괴한 관계를 유지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그만두지 못한다.
슬픈 점은 소년범 중 소녀들의 세계에서도 아주 명백하게, ‘성 관련 경험’을 기준으로 하는 ‘계급’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같은 시설에 머무르는 아이들일지라도 타의로 성범죄에 가담한 소녀의 경우에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소년범 생태계’ 내의 최약자가 되었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 가장 손쉽게 선택하는 ‘성매매’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또래들 사이에서 가장 큰 비난을 받는 일이기도 하다.
얼마나 오래, 많은 성매매를 했느냐에 따라 아이들 간의 ‘등급’이 달라질 정도로, 이것은 아이들에게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가 되곤 한다.
10대들의 세계에서 성관계와 성폭행, 그리고 성매매의 경계는 몹시 모호하다. 아이들이 성매매로 빠지는 이유는 저마다 다양하다. 그러나 이러한 동기들보다 중요한 점은, 바로 이들이 아직 ‘미성년자’라는 사실이다.
청소년들은 아직 ‘미성숙’하기에 ‘보호’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다. 다시 말해 아이들의 범죄는 이들을 제대로 이끌어 줄 어른과 올바른 성교육의 부재로 인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아이들에게 있어 범죄에 발을 들이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소문’은 지나치게 빠르기 마련이고, 때로는 원치 않는 영상들이 발목을 잡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 기댈 곳이 필요한 아이들의 곁에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PIXABAY
우리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너무도 당연한 부분이라 오히려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으나, 그렇기에 이유 모를 찜찜함을 느끼셨을 분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원래부터 미성년자 성매매는 ‘불법’이다. 그렇다면 또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어째서 처벌해야 할 대상인 상대 남성들이 아닌, 피해자인 아이들이 처벌받게 되는 것인가?
그 이유는, 우리 사회의 ‘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 법은 이러한 아이들을 피해자가 아닌 범죄자로 분류했다. 그렇기 때문에 2020년 4월 아동⋅청소년보호법 개정 전까지 성매매에 연루된 아이들은 전부 보호처분 대상으로 처벌받을 수밖에 없었다. ‘강제로 성매매를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다면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청소년의 성행위 자체를 죄악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은 대개, 그 알선자보다는 성매매 당사자인 소녀들의 죄를 더 크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성매매 알선자와 성 매수자들이 이러한 법의 허점을 이용하여 소녀들에게 협박과 회유를 일삼았다는 점이다. 갈 곳도, 돈도 없는 가출 소녀들의 절박한 상황을 악용하여 성매매로 몰아넣어 버리고 나면, 이미 그렇게 먹이사슬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하게 된 아이들로서는 다시 그 길을 걷는 방법 외에는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일상에서 범죄로 넘어가게 되는 그 ‘경계’는 너무나도 희미했고, 당장 내일을 살아가야 했던 아이들은 가장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기꺼이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한쪽은 가해자, 다른 한쪽은 피해자. 우리는 소년범이자 청소년 성매매 피해자입니다
보통 소년범죄에서 두드러지는 건 소녀가 아닌 소년들이기 마련이다. 자연히 소년범을 다룰 때 주가 되는 것은 소년들이 되었고, 소녀들은 집중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나 여성 소년범들을 보다 집중적으로 살펴보게 되면, 법적 처벌을 받은 ‘소녀 범죄자’들이 동시에 여러 상처를 가진 피해자로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년범과 청소년 성매매 피해자, 이 두 가지는 서로 굉장히 상이한 단어처럼 느껴진다. 한쪽은 가해자고 다른 한쪽은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둘은 놀랍게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결과적으로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대상이란 바로 ‘여성 소년범’이라는 것을, 사회를 비롯한 우리 성인들은 반드시 새겨두어야만 한다.
우리 사회에서 성매매 논의가 일어나면, 정작 성을 사는 상대방인 남성은 빠져 있을 때가 많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수요가 있기에 공급이 생긴 것이었다. 아이들도 물론 머리로는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저마다의 여러 가지 이유로 성매매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결국 자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문화가 만들어진 게 아이들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야말로 이런 상황을 초래한 주범이 아닐까?
아이들의 몸을 사는 것은 성인이지만,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는다. 성매매를 노동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는 우선 차치하고 볼 문제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불법’으로 정해진 상황에서 성매매한 여성과 소녀들에게만 그 비난이 쏟아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일을 저지른 아이들은, 그 길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다른 길을 알려주는 사람 또한 없었다. 보고 배울 어른이 없는 현실 속에서, 아이들은 비슷한 수준의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그 작고 간단한 소망을 이루기엔 아이들의 상처가 너무 크고 깊었다.
참고문헌
이근아, 김정화, & 진선민. (2021). 우리가 만난 아이들. 위즈덤하우스
기사 다시보기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ming.x.d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