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세현
[한국심리학신문=황세현 ]
점점 늘어나는 혐오의 표현
우리는 익숙해지면 안 되는 것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그것은 혐오 표현이다. 사람들이 혐오 표현에 무뎌지는 것은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좋은 신호가 아니다.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인 공공의 안전에 대한 보장은 혐오 표현에까지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혐오를 표현하는 행위를 표현의 자유에 포함해도 되는 것일지, 허용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윤리적 고심이 더 필요하다.
편견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혐오
인간은 이미 편견을 갖고 사회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뇌의 정보처리 능력의 한계로 인해, 편견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효율적이고 편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와 몸은 익숙한 것을 더 하고 싶어하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적응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상을 볼 때에도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기반으로 판단을 내려버린다. 이는 편견에 대한 하나의 생물학적 설명이다.
Pixabay
편견에서 비롯되는 차별뿐만 아니라 민족중심주의, 외집단 적대, 공격적 행동 등도 혐오에서 비롯된다. 가장 쉽게 일어나는 혐오는 소수 집단을 향한 그것이다. 이 유형의 혐오는 일반적으로 소수 집단의 존재를 사회의 다수에 대한 위협으로 보는 데서 비롯된다. 혹은 단순하게 수적인 우월감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다수가 소수보다 항상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법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다수의 편은 소수의 편 위에서 우월감을 느끼기가 매우 쉽다.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내집단 편향
외집단에 대한 적대는 내집단 편향과도 연관이 있다. 내집단은 내가 속해 소속감을 느끼는 집단이고, 반대로 ‘우리’에 속하지 않는 외부의 집단을 외집단이라고 한다. 인간은 내집단 편향을 갖고 있어, 자신이 속한 집단의 구성원들을 외집단의 구성원들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내집단과 외집단의 멤버가 똑같은 행동을 했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평가할 때 내집단 멤버의 경우 행동과 사람 자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외집단 멤버의 경우 행동 그 자체만 평가한다.
내집단 편향이 일어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와 같은 곳에 속해 있는 사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곧 그 공동체를 긍정적으로 평하는 일이고, 이는 따라서 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집단 편향은 외집단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기도 한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무조건적으로 더 낫기 때문에 그 외의 집단은 배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 사회의 많은 갈등 양상에 대한 설명이 되어준다.
중간이 사라진 사회
사회가 점차 양극화되어가고 있다. 중간이 사라진 사회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제 중도를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고, 모두가 각자의 극단에 서서 반대편을 향한 비난을 쏟아낸다. 극단을 주장하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나, 반대편과의 소통을 포기해 버리는 것은 문제가 된다. 현재 우리는 서로를 향해 비난과 혐오, 혹은 포기에서 비롯된 무관심을 표현한다.
그러나 현재 필요한 것은 그중 무엇도 아닌 소통이다. 무조건적인 비난과 혐오는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지금은 비난이 아닌 비판이 이루어져야 한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의지와 관심, 그들의 의견을 듣고 또 우리의 주장을 정당한 방법으로 피력하는 행위, 그에 이어지는 토론과 협상이 일어나야 한다. ‘티키타카’가 일어나야 하는 상황에 지금은 오히려 ‘집단적 독백’, ‘먹금(먹이 금지. 쓸데없는 말에 관심을 주지 말라는 뜻으로 쓰인다)’, ‘키보드배틀’이 일어난다.
혐오의 근원
혐오의 근원은 혐오 객체에 대한 평가 절하와 혐오 주체의 이념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도 증오의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낼 수 있는가? 서로에 대해 주관적이고 배타적이기까지 한 평가를 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까지에는 사회의 다양한 요인들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과격한 방식으로, 상대를 해하는 방법으로 표출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타인을 다치게 하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혐오에 대항하여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
Pixabay
나와 같은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사람을 외부의 적이라고 생각하기를 멈춰야 한다. 우리 모두는 어딘가에 속하기도, 속하지 않기도 한다. 내가 속했다고 해서 그 모든 집단이 동일한 모습을 띠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동일함에 대한 추종을 멈추어야 한다. 우리의 사회는 다양성과 차이로 인해 더 풍부해진다.
혐오가 팽배한 이곳에서, 우리는 타자를 타자로 인식하고 다름을 인정하자. 한병철은 그의 저서 『타자의 추방』에서 “갈수록 상대는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전락한다”고 썼다. 현 사회의 모습을 날카롭게 관통하는 표현이다. “나”에게만 집중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너와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서로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중간으로 향하는 서로의 한 발자국에서 시작될 것이다.
기사 다시보기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wangseh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