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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고다연 ]



“휴대폰 저장 공간이 가득 찼습니다.”


A는 오늘도 하루 종일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갑자기 뜬 알림에 갤러리를 들어가 본다. 언제 저장한 건지 모를 사진 수천 장이 A를 반긴다. 지우려는 사진을 고르기 위해 오랜만에 갤러리 속 사진을 둘러보다 몇 장의 사진을 겨우 골랐지만, ‘이때 좋았는데…’ ‘언젠간 이 사진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삭제’ 버튼이 아닌 ‘취소’ 버튼을 누른다. 결국 지우려고 했던 사진은 한 장도 지우지 못하고 매번 돈을 내고 용량을 업그레이드시키는 A이지만, ‘남들 다 이렇겠지’라는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A는 자료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저장해두는 강박 증상을 보이는 ‘디지털 저장강박증’일지 모른다.




나도 혹시...?


EBS Documentary [다큐 시선 - 마음의 그늘, 저장강박_#002]

한 다큐멘터리 속에서 디지털 저장강박증이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는 40개가 넘는 하드디스크와 11개의 휴대전화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중 통화요금이 나가는 휴대전화는 6개나 된다. 2,000만 원어치 하드디스크에는 20만 개가 넘는 파일이 120TB가 넘는 용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락방에는 예전 컴퓨터 부품과 케이블, TV 카드가 수십 개의 박스 속 보관되어 있었고, 지금은 쓰지도 못하는 디스크가 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이 모습을 ‘디지털 저장 강박’이라고 정의했다.


저장 강박이란 “당장 ‘쓸모가 없는’ 물건임에도 나중에 필요할지 걱정이 되거나 불안해하는 것”을 뜻한다. 쓰레기를 방 안 가득히 모으거나, 고물을 버리지 않고 모으는 사람 전부 저장 강박에 해당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PC, 스마트폰에 사진, 파일 등을 지우지 못하고 계속 저장만 해두는 증상을 ‘디지털 저장강박증’이라고 한다. 


세계적 디지털정보 관리업체 ‘베리타스’가 13개 나라 10,022명을 대상으로 데이터 저장 행태를 조사한 결과, 스마트기기 사용자 10명 가운데 9명이 ‘디지털 저장강박증’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또한, 이 조사에서는 응답자 중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에 해가 될 수 있는 데이터를 개인 혹은 회사 컴퓨터나 저장기기에 저장하고 있다”는 비율이 96%로, 전체 평균인 83%보다 훨씬 높았다.




많이 소유할수록 불안감만 더 증가


그렇다면, 왜 이러한 증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이는 정서적 요인이 가장 큰 이유다. 서울시 보라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유소영 교수에 따르면, 디지털 저장강박증이 있는 사람은 데이터를 지우면 자신의 추억과 감정이 사라진다고 느끼며, 언젠가 그 데이터를 다시 사용할 수 있단 생각에 지우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누구나 손쉽게 용량을 늘릴 수 있는 것도 증상 유발의 한 원인이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과거엔 어쩔 수 없이 데이터를 지워야 했던 반면, 현재는 소액의 돈만 지불하면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이 늘어나기 때문에 디지털 저장강박증이 있는 사람들은 데이터를 지우기보단 용량을 늘리는 것을 선택한다. 


그러나 데이터의 ‘유한함’과 ‘불확실함’은 불안함을 유발하게 되고, 그 불안함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저장하려 하지만, 더 많이 소유할수록 소외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디지털 저장 강박은 단순히 지우기 귀찮아서 삭제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 증상이 있는 사람들은 데이터를 ‘지운다’는 것은 재산을 잃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내 몸의 일부가 나가는 정도의 불안감을 느낀다. 위의 ‘베리타스’의 조사에서 쌓아둔 데이터를 삭제하라는 지시를 받지 않는 대신 “3개월 동안 주말 근무를 할 수 있다”, “내 옷을 전부 처분할 수 있다”고 답한 응답자가 대다수를 차지했다.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할 증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문제점과 심각성을 인지하고 관련 규제 등을 모색할 필요도 있지만, 이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이 증상이 있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치료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 강박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이들이 상실을 치유하고 스스로 수용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누구나 태어났다면 끝은 죽음이듯이, 상실은 피할 수 없다. 이 상실을 받아들이고 슬픔의 과정을 거쳐 빈자리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태어나고, 잃고, 죽는 것. 이게 바로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참고문헌

다큐 시선 – 마음의 그늘, 저장강박_#002 [EBS Documentary]. (2017). https://www.youtube.com/watch?v=VWaQuHVOSO0

필요 없는 파일도 지우지 못하는 ‘디지털 저장강박증’…비움이 필요한 시대 [시선뉴스]. (2022). https://www.sisu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7819

한국인들, 데이터 저장강박증 심하다 [한겨레]. (2016). https://www.hani.co.kr/arti/economy/it/773660.html

핸드폰 ‘사진’ 못 지우는 것도 병 ‘디지털 저장강박증’ [헬스조선]. (2022).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22/07/19/2022071901994.html 

물욕과는 다른…’저장 강박’이 무서운 이유 [헬스조선]. (2022). https://m.health.chosun.com/svc/news_view.html?contid=2022071201969

[장윤미의 문화톡톡] 저장이 생존을 위협할 때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20).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3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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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7-02 17: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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