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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서정원 ]

 

인간의 합리성에 딴지걸기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이다.’ 여러분은 이 말에 얼마만큼 동의하시나요? 얼핏 들으면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일 것 같습니다. 인간 존재를 설명하는 수많은 말이 이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이 처음 꽃피운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합리성, 이성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최고의 가치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현 인류의 종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지혜가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성, 사고력은 다른 생물 종들과 인간을 확연히 구분 짓는 대표적인 능력으로 묘사되어 왔습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구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이 순간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신하는 근거를, 인간의 사고하는 능력으로부터 찾은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을 이성을 지닌 합리적 존재로 바라보는 시각은 인류사에서 끝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합리성에 딴지를 거는 주장이 등장했습니다. 그것도 인간이 사고하는 과정을 분석하는 학문인 ‘인지 심리학’에서 말입니다. 인지 심리학에서는 그동안의 인류사 속 시선과는 반대로,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일 수 없다고 바라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정확한 판단을 하려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대신 어떻게든 ‘짧은 시간’에, ‘가장 적은 생각’으로, ‘꽤 괜찮은 판단’을 하려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합리성, 정확성보다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인지적 구두쇠


메뉴가 엄청나게 많은 식당에 가서 뭘 먹을지 고르느라 진땀을 뺀 적이 있지 않으신가요? 차라리 메뉴가 몇 가지 없었다면 고르기 훨씬 수월했을 텐데, 선택지가 많아지니 오히려 머리가 아픈 경험이 다들 있을 겁니다. 이러한 인간 특성을 묘사하는 재미있는 표현으로 ‘인지적 구두쇠’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생각하는 것에 게으른 존재입니다. 식당에 가서도 ‘내가 좋아하는 취향인지’, ‘어제 먹은 메뉴와 안겹치는지’, ‘가격은 적당한지’, ‘빨리 나올 수 있는지’와 같이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꼼꼼히 따져보며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능력이 충분히 있음에도, 인간은 이 능력을 사용하기 귀찮아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사고의 중추인 뇌가 이미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인 생명 유지 장치인 뇌는 계속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에너지를 추가로 요구하는 복잡한 사고와 판단을 자연스레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빠른 판단, 즉 적은 생각을 선호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의 사고를 할 때, 대략 어림잡아 짐작해서 신속하고 직관적인 판단을 내리고는 합니다. 우리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어림셈법을 ‘휴리스틱(Heuristic)’이라고 부릅니다. 



머릿속의 바다에 닻을 걸기 : 기준점 휴리스틱



인간이 사용하는 휴리스틱에는 많은 종류가 존재하지만, 이중에서도 많은 사람에게 공감이 갈 법한 한 가지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바로 기준점 휴리스틱입니다. 기준점의 원어는 Anchoring으로, 직역하면 ‘닻 내림’입니다. 여기서 닻은 배를 바다 밑의 땅에 고정하려고 물속에 던지는 그 닻을 의미합니다. 이름만 들어서는 이 휴리스틱이 어떤 것인지 감이 잘 오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시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인구는 5,000만보다 많거나 적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스트레일리아의 인구는 얼마나 될까요? 여러분이 이 질문의 답으로 떠올린 숫자는 얼마였나요? 아마 5,000만의 언저리를 멤돌 것입니다. 그 이외의 숫자는 생각하기 힘든 것이 정상입니다. 5,000만이라는 숫자를 들은 순간, 기준점 휴리스틱의 닻에 이미 걸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정답인 오스트리아의 인구는 2,600만정도 밖에 안됩니다. 


사실 문제 속 숫자는 무시해도 상관없었습니다. ‘많거나 적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를 무시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질문 속의 숫자가 1,000만이었다면, 여러분의 대답 또한 1,000만이라는 숫자의 언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숫자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임의의 숫자라고 해도 처음 들은 숫자가 닻처럼 박혀 우리 머릿속의 바다에서 기준점으로 자리 잡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준점으로 자리 잡아버린 숫자에서 잘 움직이지 못하는 이것이 바로 기준점 휴리스틱입니다. 

 


숫자 하나에도 흔들리는 우리



우리는 이 기준점 휴리스틱을 물건을 살 때 자주 경험합니다. 물건의 값어치를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이전부터, 이미 가격의 숫자로 인해 영향을 받아버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 실험에서는 참가자들에게 2만원 짜리 물건에 대해 ‘가격표를 보지 않은 채’ 협상을 하여 구입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1만 5천원의 값으로 물건을 구입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집단에게 2만원짜리 ‘가격표를 보여주고 난 후’ 협상으로 구입하게 했을 때, 평균 1만 8천원으로 구입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기준점 휴리스틱에 의하면 우리는 처음의 닻 내림 이후에 조정 가능한 값이 우리 머릿속의 ‘그럴듯한 값’의 범위에 진입하는 순간, 조정을 멈춘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실험의 현상을 다시 본다면, 가격표를 본 집단은 2만원이라는 가격에 이미 닻이 걸려버려서, ‘그럴듯한 값’의 범위를 2만원에 가깝게 설정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협상으로 가격이 그 범위에 도달한 순간, 협상을 멈추어버려서 더 비싼 값을 지불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닻 내림을 유도하는 수법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기준 값을 듣기 전에 먼저 자신만의 절대평가를 내려보아야 합니다. 아니면 “저건 5천원짜리일 수도, 2만원짜리일 수도 있어”와 같이 생각하며 기준값을 일부러 여러가지 가져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결국 이는 모두 남의 닻에 넘어가기 전에 내 닻을 공고히 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닻내림을 유리하게 이용한다면?




이러한 기준점 효과가 더욱 강해지는 특별한 상황도 있습니다. 바로 요청(request)하기보다, 제안(offer)할 때입니다. 요한 마요르 교수 연구팀은 모의 주식 협상 실험을 열고 두 실험집단 중 한 집단은 요청을 먼저 하도록 하고, 다른 집단은 제안을 먼저 하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어 요청집단은 “각 3달러에 주식 N주를 요청합니다.”라고 하고, 제안 집단은 “주식 N주를 각 3달러에 드리게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험 결과, 제안 집단이 요청 집단보다 더 많은 이득을 보았다고 합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요청은 상대에게 무언가를 ‘가져오는 것’에, 제안은 ‘주는 것’에 초점을 가게 만든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때문에 요청을 받으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이 포기해야할 것에 집중하게 되어서 부정적인 반응을 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반대로 제안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이 받는 것에 집중하게 되어서, 제안 속에 들어있는 숫자에 ‘닻 내림’이 쉬워집니다. 즉 표현의 방법을 달리하여 내 의도대로 상대가 기준점을 맞추게 유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준점 휴리스틱에 이용당하기도 하고,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 참 재미있지 않나요?


 

불완전하기에 더욱 인간다운


오늘은 숫자 하나에도 닻이 걸려 단순하게 판단해버리는 기준점 휴리스틱 현상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비록 인간의 판단이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이것이 단순히 ‘인간은 비합리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인간은 판단에 있어서 합리성이 아니라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시간과 노력의 절약일 수도 있고, 선택에서 느껴지는 만족감일 수도 있고, 이외에도 얼마든지 다른 요소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라는 말에 동의하시나요? 어쩌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이러한 불완전함 때문이 아닐까요? 




<참고자료>

신승환. (2014). 이성 개념의 현대적 이해. 철학논집, 37, 31-55.

김경일, 『지혜의 심리학』, 진성북스(2017)

김경일, 매일경제, “[CEO 심리학] 협상을 시작하는 첫마디…요청하지 말고 제안하라” 2021.02.18 (https://www.mk.co.kr/news/business/9753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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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8-05 17: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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