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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김정은 ]



30명의 무고한 여성을 해친 미국의 연쇄살인마 테드 번디는 이렇게 말했다.

 

“난 짐승이 아니야.

난 미치지 않았고, 다중인격도 아니지.

난 그냥 보통의 한 사람이야.”

 

“우리 연쇄살인범은 너희의 아들이요, 남편이다.

우리는 어디에나 있지.

내일은 더 많은 아이들이 죽어 있을 거다.”

 

실제로 테드번디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연쇄살인마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별명이 귀공자였을 만큼 미남이었고 인간관계 또한 원만했으며, 심리학과 법학을 전공한 지식인이었다. 심지어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에 참여하던 전도유망한 젊은 정치인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유행처럼 번졌던 칼부림, 대한민국 전체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N번방 사건, 보험금을 노리고 남편을 살해한 아내 등 극악무도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하지만 우리를 더욱 공포스럽게 한 것은 그들의 모습이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얼굴에 범죄자라고 써있지 않았다. 매일 아침 출근길의 지하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 그것이 이들의 정체였다. 

 

하지만 사회는 “악인”들과 “우리”를 분리한다.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나르시시스트라는 단어에는 평범한 우리로부터 평범하지 않은 악인들을 분리하고 지칭하기 위한 목적이 존재한다. 위 세 단어의 공통점은 “악인”과 “우리”를 분리할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이다. 과연 그 기준은 무엇일까? 




악의 평범성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이론철학가인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의 사례를 소개하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주장한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 독일에서 무려 6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결정적 관여를 한 실무자였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이후 포로 수용소를 탈출한 그는 15년 동안 남미에서 도피 생활을 하다 체포되었다. 사람들은 끔직한 학살을 저지른 악인의 모습을 예상하기 시작했다. 얼굴에 큰 흉터가 있다던가, 괴물 같은 덩치를 가졌다던가 하는 사람들의 예상은 악인의 등장에 고요해졌다. 그는 얼굴에 큰 흉터를 가지고 있지도, 괴물처럼 덩치가 크지도 않았다. 악인은 내 아이에게 사탕을 나누어주던 인자한 이웃집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나 아렌트 또한 아이히만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법정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은 명령을 받은 대로 행동했을 뿐이라며 항변했다. 그것이 6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임에도 나치 독일의 장교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니, 도덕적으로는 잘못이 있을지 모르나 법적으로는 무죄라고 주장한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훗날 이러한 아이히만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이히만은 전형적인 공무원입니다. 

그런데 한 명의 공무원, 그가 정말로 다름 아닌 한 명의 공무원일 때, 그는 정말로 위험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종종 타인을 해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나를 괴롭히는 같은 반 친구, 궂은 일을 골라 시키는 직장 상사, 매번 기분 나쁜 장난을 치는 친구를 한 번쯤 해치고 싶은 마음을 느껴보지 않은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 감정을 실행으로 옮기지 않는다. 타인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도덕, 범죄를 저지르면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법률, 타인의 고통과 감정에 공감하는 공감 능력과 이타심 등은 우리를 평범한 사람으로 남게 해준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사유”라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의 주장에 따르면 아이히만의 “사유”는 단순하다 못해 위험했다. 피상적이고 깊이 없는 사유의 결말은 타인의 입장을 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과 자신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지 못하는 불능성이었다.  이는 가족과 동물을 사랑하고 이웃들에게 친절했던 “평범한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었다.




일상의 사유


아이히만의 사례는 일상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대표적 예로 학교폭력이 흔히 거론된다. 학교폭력과 같은 괴롭힘은 괴롭힘을 주도하는 강한 주동자를 중심으로 주동자들의 측근들이 형성되고, 주동자 무리가 피해자를 괴롭히는 분위기를 조성함에 따라 다른 사람들도 피해자를 함께 괴롭히거나 방관하게 되는 행태가 대부분이다. 강한 힘을 가진 주동자의 심기를 건드려 다른 피해자가 될까 오히려 다른 가해자가 된다는 것이다. 또는 주동자의 명령과 같은 말에 실제로 휩쓸려 버리는 경우도 존재한다.


위의 상황을 초래한 것은 단 하나, "사유의 부재"다.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괴롭히는 이 상황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내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편안한 현재의 상황에 안주하여 자신의 행동이 상대에게 어떠한 피해를 입히는지, 자신의 행동이 법적 또는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인지 등의 사유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장난이니까' 혹은 '어쩔 수 없지' 라는 아주 안일하고도 무책임한 동기로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사유를 하지 않는 순간, 이들이 학교라는 작은 사회 내의 아이히만이 되어버리는 것은 시간 문제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학교를 벗어난 사회에서도 "사유의 부재"로 인한 악행들이 만연하다는 점이다. 최근 SNS의 발전으로 연예인과 같은 공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극심한 수위의 악플에 시달리는 것이 논란이 되었다. '물타기'는 한 사람이 한 대상을 공격하는 게시물, 댓글을 게시하면, 그 게시물에 이후의 댓글과 게시물은 이에 동조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어져 마치 나비효과처럼 거대한 여론이 형성되는 현상을 말한다. 누군가를 향한 비난은 정당한 것이 아님에도 '남들도 하니까' 라는 생각으로 모인 사람들이 여론을 형성한다니, 사유가 마비된 현사회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는 듯하다. 


사회는 새로운 문제점을 맞닥뜨렸다.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국가 간 전쟁과 약탈 등은 감소했지만 사회 내의 집단과 집단, 개인과 개인의 문제는 증가하고 있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않고 도움을 주지 않는 사회 분위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타인을 비난할 수 있는 사이버 세상의 발전 등은 이해할 수 없는 이상동기 범죄의 증가와 더욱 잔혹한 범죄 행태로 이어지고 있다. 


악한 의도를 품지 않더라도 사유하지 않는다면 평범하고 당연한 행동은 순식간에 “악”이 되어버릴 수 있다. 확인되지 않는 말과 다수에 휩쓸려 사유하지 않는다면 멋진 외모와 좋은 학벌, 많은 재산과 좋은 인간관계를 가진 당신도 한순간에 악인이 되어버릴 것이다.


우리는 사유해야만 한다. 모든 사람은 타인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악”보다는 “선”에 강한 끌림을 느끼지만, 깊이 있는 사유를 하지 않고 1차원적 사유를 저지른다면 “악”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 것이다.


“악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량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에드먼드 버크




참고문헌

1.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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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11-25 10:4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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