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기사수정

[한국심리학신문=김나윤 ]


Yes 24 제공

지난 기사에서 생의 고통과 좌절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비관적 낙관주의적 태도에 대해 소개했다. 여기서 로고테라피를 창시한 빅터 프랭클을 간단히 언급했다. 오늘은 빅터 프랭클이 로고테라피를 창시한 배경인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존 경험을 담은 그의 대표작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감상을 나누어보려고 한다.




죽음이 도사리는 아우슈비츠에서의 기억



'죽음의 수용소에서' 는 정신과 의사로 일하던 빅토르 프랭클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홀로코스트 동안의 기억을 종합하여 1946년 써낸 책이다. 이 이야기는 강제로 연행되어 목적지를 모른 채 기차에 실려 가는 여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은 기차가 군수 공장으로 향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차창으로 아우슈비츠라는 팻말을 보고 좌절하게 된다.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노동이 가능한 사람과 불가능한 사람으로 분류되며, 프랭클은 간신히 노동이 가능한 사람으로 분류된다. 90% 정도는 노동이 불가능한 병자, 여자, 노인 등 이었으며, 그들은 곧바로 가스실로 향한다. ‘샤워실에 간다‘는 명목을 듣고 손에 든 비누 한조각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 GETTY IMAGE 제공.

이곳에서 유대인은 사람다운 대우를 받지 못한다. 이들은 이름이 사라지고 수험 번호로 불리는 삶을 살아가며, 그동안 살아온 인생과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모두 불투명해진다.

 

"사람은 글자 그대로 번호가 되었다. (중략) 그 번호의 이면에 있는 것, 즉 그의 삶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 된다. 그의 운명과 그가 살아온 내력 그리고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

 

수용소의 생활은 시작부터 냉혹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하루에 빵 한 덩이만 먹으며 혹독한 추위에서 하루 종일 노동하고 몇시간 눈을 붙이지 못하는 극한의 생활을 하며 사람들의 양심은 무뎌진다. 일례로, 저자는 수용소의 병자들을 진료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환자가 사망해 눈이 쌓인 길바닥에 버려지고, 그 시체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정말 놀랄 만큼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일지 않았다고 말했다. 




양심이냐, 생존이냐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잔혹한 폭력과 도둑질은 물론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수감자들은 수용소의 사정에 따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지는데, 어떤 때에는 수용소로 옮긴다고 말하고 가스실로 보내지는 경우도 있다. 번호로 사람을 구분하기 때문에 번호만 바꿔치기하면 가스실에 가지 않고 남을 수 있다. 그래서 친구의 번호와 자기의 번호를 바꿔치는 등 양심보다 생존이 앞서는 선택을 한 자들이 살아남는 것이다.




살고자 하는 이는 곧 살 것이니



작가는 책을 시작하면서 니체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살고자 하는 의지이는 로고테라피의 핵심을 관통하는 문장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것‘은 곧 삶의 이유를 잊지 않는, 삶의 의미를 항상 지니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살고자 하는 의자, 자기 삶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생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극적으로 보여주는 한 사례를 보여주겠다.

 

"내가 이 경우를 통해 관찰하고 도출해 낸 결론은 후에 수용소 주치의로부터 들었던 말과도 일치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추세로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주치의는 이 기간에 사망률이 증가한 원인은 보다 가혹해진 노동조건이나 식량 사정의 악화, 기후의 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가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기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뉴스가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었으며, 절망감이 그들을 덮쳤다. 이것이 그들의 저항력에 위험한 영향을 끼쳤고, 그중 많은 사람이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

 

 희망과 삶의 의미가 살고자 하는 의지를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통과 좌절의 앞에서도 삶의 의지를 다져야 하는 이유


 

<죽음의 수용소에서> 는 그다지 감성적이지 않았다. 수용소에서의 처절한 생활과 고통, 이별 그 속에서도 존재하는 사람들 간의 유대와 사랑 등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작가는 매우 담담한 필체로 수용소에서의 비극을 써 내려간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라는 지옥을 경험한 개인의 에세이이기도 하지만, 전문의가 극한의 상황에서 타인이, 또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객관적으로 기록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야 하는 이유를 이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글쓴이가 인용했던 비스마르크의 말을 이 기사에서 한 번 더 인용하며 마무리하려 한다.

 

"인생이란 치과의사의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 




*참고 문헌

1). 빅터 프랭클 . (2020). 죽음의 수용소에서 (pp. 1-224). n.p.: 청아출판사 . 





지난 기사보기

그 사람이 싫은 이유는 냄새 때문? 당신이 몰랐던 후각의 심리학

[행복 1부] 당신의 뇌는'팝콘 브레인'인가요? 숏폼이 주는 짜릿하지만 위험한 행복

[행복 2부] 당신의 행복을 스크린에 가두지 마세요

“케이크를 똑같이 나누는 방법을 모르겠어요" 우리가 모르는 경계선 지능인의 이야기

"동료 20%가 당신과 다시 일하기 싫어합니다" 양날의 검, 다면평가

00에서 공부하면 시험에 더 유리하다? 맥락일치효과

'인정하면 편해' ... 비관적 낙관주의로 고통을 바라보는 법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psytimes.co.kr/news/view.php?idx=9420
  • 기사등록 2024-12-15 06:32:34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