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민
[한국심리학신문=김정민 ]
'희생양'이라는 단어는 오래된 유래를 가지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속죄의 날에 두 마리의 염소를 선택했다고 한다. 한 마리는 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마을의 모든 죄를 상징적으로 떠안고 광야로 쫓겨났다. 이렇게 죄를 짊어진 염소가 바로 '희생양'의 기원이다.
1. 희생양 (scapegoat)이란 무엇일까?
오늘날 '희생양'은 어떤 문제나 실수를 해결하기 위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부당하게 비난받는 상황을 묘사할 때 쓰인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는 한 자녀가 "문제아"로 낙인찍혀 가족의 갈등을 떠안거나, 사회에서는 특정 집단이 경제적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경우가 있다. 희생양이 된다는 것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큰 책임을 떠맡아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은 끊임없이 비난받고, 종종 소외되며, 자신은 잘못되었다는 인식 속에서 살아간다.
2. 희생양은 왜 생길까?
희생양은 개인적인 문제나 잘못이 아니다. 이는 사람들이 내면적 불안과 갈등을 직면하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 심리적, 집단적 메커니즘에서 비롯된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전이와 투사라는 방어기제로 설명한다.
전이는 자신이 느끼는 불쾌한 감정을 다른 대상에게 옮겨 그 감정을 해소하려는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예를 들어, 부모가 직장에서 느낀 좌절감을 아이에게 화를 내며 표출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반면, 투사는 자신이 가진 부정적인 특성이나 감정을 타인에게 있다고 믿어 비난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이는 "네가 이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며 상대방에게 문제를 돌리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가족 내에서 희생양 역할을 맡은 사람은 종종 스스로 ‘문제아 역할’을 이어갈 때도 있다. 자신이 문제의 원인이 되면 가족 내 다른 갈등과 긴장은 사라진다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희생해 가족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생존 전략으로 내면화된 행동의 결과다.
이러한 방어기제의 작동은 개인에게 일시적으로 심리적 안정을 줄 수 있지만, 희생양이 된 사람에게는 심각한 고통과 상처를 남긴다. 반복적인 전이와 투사를 경험한 희생양은 자신의 감정과 판단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자신이 진짜 문제라고 느끼게 된다. 이는 결국 깊은 자기 의심과 죄책감을 형성하는 결과를 낳는다.
3. 희생양이 겪는 감정
글쓰기를 좋아하던 한 아이는 가족에게 자신이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넌 그럴 재능이 없어”라고 단언하며 아이의 꿈을 비웃었고, 가족 앞에서 이를 반복해 조롱했다. 이 충격에 아이는 자신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점점 멈췄다. 자신이 꾸던 꿈마저 “가치 없다”는 생각으로 묻어버린 것이다.
(Kindera, 2023)
이러한 경험은 반복될수록 아이에게 점점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상황에서 희생양으로 몰린 아이는 과연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고립감
희생양은 반복되는 비난 속에서 자신이 누구와도 연결될 수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위 일화의 아이는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고 가족의 지지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을 형성했다. 이로 인해 감정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신뢰를 잃게 될 수 있다. 고립감은 희생양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혼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소외되고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이어진다. 따라서 희생양이 성인이 되어도 깊은 상처로 남아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도록 야기할 수 있다.
죄책감과 수치심
희생양은 자신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듣게 되면서, 자신을 비난하는 습관을 만들게 된다. 일화 속 아이는 “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가족이 나를 비웃는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나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수치심으로 발전할 수 있다. 수치심은 희생양의 행동을 억압하고, 자아 존중감을 떨어뜨리는 강력한 감정이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면화하면서 "내 탓이다"라는 비합리적인 믿음이 강화되고, 이는 자존감을 약화시켜 자신을 더 작은 존재로 만들게 한다.
감정 억압
희생양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학습하게 된다. 아이가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려 했을 때, 가족의 반응은 더 큰 비난이었다. 이 경험은 “내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는 믿음을 강화시키고, 감정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이로 인해 희생양은 분노, 슬픔, 좌절감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고, 감정이 내면에 쌓여 심리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억누르는 행동으로 이어져 더 큰 심리적 고통을 야기한다.
4. 희생양들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희생양은 자신의 선택으로 그 역할을 맡은 것이 아니다.
희생양 경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치유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자기 연민과 긍정적인 내면의 대화를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는 첫걸음을 뗄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따라서, 가정, 학교, 직장 등 공동체 차원에서 이러한 상황을 예방하고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지원이 필수적이다.
희생양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지만, 이는 결코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만약 이 글을 읽으며 공감하거나 특정한 누군가가 떠올랐다면, 당신은 이미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치유의 여정이 쉽지 않겠지만, 자신의 감정을 천천히 돌아보고, 인정하고, 보듬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와 함께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이고 싶다. 누구나 존중받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참고문헌
자폐 스펙트럼 장애: 조기 진단이 삶의 변화를 만든다 ①
자폐 스펙트럼 장애: 조기 진단이 삶의 변화를 만든다 ②
신경 다양성이 주는 교훈: ‘정상’이 아닌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사회의 변화
NDBI 자연주의 발달 행동 중재: 자폐 아동을 위한 새로운 별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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