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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아몬드」를 통해 본 사회적 낙인 효과와 공감의 이중성 - 당신의 아몬드는 안녕하십니까?
  • 기사등록 2021-04-02 13:41:31
  • 기사수정 2021-04-02 17:3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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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박지희 ]




아몬드를 읽으며,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 장 한 장마다 생각이 변했다. 초반, 중반, 후반이 아닌, 한 장 단위로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아몬드’ 속 윤재와 곤이의 서사가 바로 그러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 애써 외면했던 것을 마주했을 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윤재는 알렉시티미아, 즉 감정 표현 불능증을 앓는 인물이다. 선천적으로 편도체의 크기가 작아 기쁨, 분노, 슬픔 등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해 ‘괴물’로 낙인이 찍힌다. 윤재의 엄마는 아몬드를 먹으면 나아질 것이라 믿고 아몬드를 꾸준하게 먹이지만, 윤재의 몸속 아몬드는 자랄 생각이 없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어머니, 할머니와 외식을 하러 나간 윤재는 눈앞에서 어머니와 할머니가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한다. 어머니는 식물인간이 되었고 할머니는 사망했지만, 윤재의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눈물을 어떻게 흘리는지를 몰랐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괴물’의 낙인에 더욱더 짙은 색을 덧칠했다. 


그러던 중, 곤이를 만나게 된다. 곤이는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어버려 보육원, 파양 등을 경험하며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소년원에 다녀오는 등 소위 ‘나쁜 아이’로 자라왔다. 잃어버린 아들을 애타게 찾던 부모도, 곤이를 찾은 뒤에 후회하는 모습도 보인다. 곤이는 또 다른 ‘괴물’이었다. 부모조차도 인정해 주지 않는 아이. 그런 곤이와 윤재의 만남은 ‘괴물’ 간의 만남이 되었다. 곤이는 윤재의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행패를 부리고, 나비를 찢어 죽이기까지 하지만, 윤재의 감정은 끌어내지지 않았다. 오히려 윤재는 곤이의 그런 행동을 보며 그가 사실은 매우 약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수학여행 때 곤이가 반 학급비를 훔쳐 간 범인으로 몰리게 되고, 많은 의심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사실로 바뀐다. 곤이는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이내 자신의 낙인을 깨닫고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 사회가 내게 바라는 모습이 그런 것이라면, 그렇게 살아가겠노라 다짐하게 된다. 그렇게 곤이는 어딘가로 떠나고, 윤재는 곤이를 찾으러 간다. 곤이는 강한 사람이 되고자 동경하던 철사에게 찾아갔고, 그곳에서 폭행을 당하며 살고 있었다. 윤재는 곤이를 구하려다 철사에게 칼을 맞지만, 그 순간 감정이 차오르는 걸 느낀다. 할머니가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을 때의 느낌을 알 것만 같다고 생각한 뒤, 의식을 잃는다. 


이후, 윤재는 병원에서 깨어나게 되고 어머니도 깨어나게 된다. 어머니를 본 윤재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우는 법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 그냥 자연스러운 눈물이었다. 곤이는 그날 이후 미안하다는 편지를 남기고 사라지게 된다. 시간이 흘러 20살이 된 윤재가 곤이를 만나러 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두 소년의 이야기는 처음엔 동정의 감정을, 중간에는 분노의 감정을, 끝에는 반성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윤재와 곤이는 괴물로 불리지만, 알고 보면 가장 ‘정상’의 인간이다. 윤재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해를 당하던 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카메라로 그 장면을 찍기 바빴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혹은 사회가 말하는 ‘정상’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공감을 강요하고, 강요받는다. 공감하지 못하면 냉혈한,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로 낙인찍힌다. 하지만 정작 괴물은 따로 있다. 자기 일이 아니면, 득이 되지 않으면 공감할 노력을 하지 않는 것. 그거야말로 가장 지독한 괴물이다. 정말 잔인한 건, 누군가에겐 공감을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선택적 공감을 하는 이 사회일 것이다.

 

곤이는 ‘괴물’이라는 낙인에 자신을 던지려고 노력한다. 일부러 더 튀는 행동을 하고, 윤재의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나비를 죽이기도 하며, 자신이 한 일이 아님에도 악역을 자처한다. 사실 나비가 죽은 자리를 오랫동안 쳐다보았고, 범인으로 몰렸을 때는 슬퍼했다. 그 속에는 여리고 착한 자신이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봐주지 않는다. 그렇게 공감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곤이의 말에는 공감해 주지 않는다. 그의 말을 그 자체로 이해하는 사람은 윤재뿐이다. 윤재는 그를 괴물이라고도, 나쁜 아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봐 준다. 


그런데도 곤이는 자신을 잃기 위해 애쓴다. 낙인에 점점 잠식되어가는 자신을 애써 외면하기 위한 행동들은 또 다른 낙인이 되어 괴롭힌다. ‘내가 상처받을 바에는 차라리 내가 상처를 줄 것이다’라는 생각 하나로 강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이 말하는 ‘괴물’이라는 틀에 자신을 맞춰가지만, 그것은 자신을 그 자체로 봐달라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상처받지 않고, 상처를 주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곪은 상처를 누군가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구원을 바라는, 마치 죽어가던 나비의 몸부림과 같다. 괴물로서 살아가야 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 연민, 허탈감이 ‘곤이’라는 인물을 만들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낙인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무력감과 분노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참혹함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몸부림치고 있을 이 세상 모든 곤이들. “너는 쓰레기야”, “너는 정상이 아니야”, “너는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불쌍한 사람이야”라는 말에 자신을 던지는 무수한 곤이들. 과연 불쌍하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자신과 크게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공감할 필요를 못 느끼고, 자신에게 가까워진 불행에는 공감을 갈구하는 사람들. 하지만 자기 생각과 같은 이유로 공감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 모습이 더욱 기괴한 괴물 같아 보이지는 않는가? 누군가를 사회적 낙인의 희생양으로 만들고, 정작 자신은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는 것. 이 사회에게, 모든 세상에 묻고 싶다. 당신의 아몬드는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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