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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김동연 ]

 


저기 저 악을 쓰며 우는 아기를 보라. 부모의 표정은 가관이다. 어쩔 줄 모른다. 아기 눈치 보랴, 다른 사람 눈치 보랴, 눈칫밥에 배가 불렀다. 그러나 아기는 부모의 속도 모른 채, 여전히 악, 악, 악, 악을 쓴다. 이쯤 되면 우리말만 그렇다지만, ‘악’과 ‘아기’의 어휘적 상관관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기는 악인가?



오늘날에도 성선설과 성악설


 

악을 논하려면 선이 필요하고, 선악을 말하려면 춘추전국시대를 지나칠 수 없다. 그 시대상과 학자는 모르더라도, 성선설과 성악설 정도는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명제로 성선설을 주장했다. 배고픈 아이를 보면 누구나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도덕 본성(인의예지)이 갖추어진다고 본 것이다. 반면, 순자는 맹자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론한다. “사람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니, 이 본성을 그대로 따르므로 쟁탈하는 행위”가 생긴다고 말한다.

 

이 논쟁은 동양만의 구닥다리 산물이 아니다. 근대 서양의 저명한 두 사상가 역시 인간관을 달리한다. 홉스는 욕망에 좌우되는 인간을 “끊임없는 쾌의 추구를 향해서 돌진하는 이기적 존재”로 간주했다. 그러나 루소 역시 그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인간을 (본성적으로) 악한 존재로 상정하지 않으며, 우리에게 ‘자연이 부여해 준 성향에 따라 살아갈 것’을 강조한다.

 

이처럼 본성에 대한 탐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갑론을박의 대상이었다. 편의상 맹자와 루소는 성선설로 사상적 줄기를 같이하고, 순자와 홉스는 성악설로 아우를 수 있겠다. 현학자들의 끊임없는 고찰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논쟁은 여전히 유효한 난제이다. 무엇보다도 선한지 악한지 분간하기 어려운 이유는, 곧 선악이 무엇인지부터가 답하기 모호한 데서 시작한다. 어쩌면 이 지나친 이분법은 그 자체로 우문일지도 모른다.


사실 김기현(2001)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성악설의 주장은 순자의 본래 진술과는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통찰을 존중하는 한에서 ‘성악설’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다. 또한 맹자가 말하는 성선설의 ‘성’과 순자가 말하는 성악설의 ‘성’ 또한 엄밀히는 외연이 다르다지만,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나아가는 것과 나아지는 것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성악설 쪽으로 기운다고 조심스레 밝힌다. 이것은 물론, 어떤 논리적인 판단에 기인하지는 않는다. 그저 양가에 타협점을 찾지 못한다면, 일단은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풀이하자는 마음에서 비롯될 뿐이다.

 

만약 인간이 선하게 태어난다면, 앞으로 우리네 여생은 악해질 일밖에 없다. 인생은 악의 연속이고, 세상은 구조적으로 나쁜 사람과 덜 나쁜 사람으로 나뉘게 된다. 아무리 바로잡을지라도, 선했던 아기가 악해지는 과정을 부모나 주변인들은 바라보아야만 한다.

 

한편, 인간이 악하게 태어난다면, 인생은 선이 연속되는 과정이다. 악하게 태어난 존재를 필연적으로 용인해야 하는 상황은 비루하겠지만, 동시에 일깨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그 와중에 어쩔 수 없이 악한 행동을 간간이 취하겠지만, 그 빈도가 줄어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어떻게 성장하는지에 따라 아이의 무한한 악을 무궁한 선으로 갈음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인간은 나아간다. 나아가는 것과 나아지는 것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두 말을 혼용해 왔다.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의 내가 조금 더 나아지리라고 보장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매번 속고, 속아준다. 이 작은 착각이 살아있는 날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동력이 아닐까. 그러니 악을 쓰며 우는 아기는 언제나 환영이다. 한껏 울어라. 앞으로 나아갈 테니. 실컷 울어라. 사랑받은 만큼 나아질 테니. 악, 악 울어라. 언젠가는 원 없이 울었던 그때가 그리워도 울지 못할 테니.

 

* 참고 문헌

1) 김기현. (2001).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에 대한 현대적 조명. 대한철학회.

2) 최준호. (2006). 홉스와 루소의 인간관 : 심신관계에 대한 가치론적 고찰. 대한철학회.

3) 김주영. (2023). 퓌시스와 노모스, 자연과 인위의 경계 좁히기 -순자(荀子) 성악설 재고찰.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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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5-04-07 08: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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